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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의 여름휴가 이야기

나이가 드니 피서가기도 귀찮다. 최근 몇 년간은 그저 집에서 뒹굴다가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이나 영화관에서 게으른 휴가를 보내왔다. 그런데 올여름 휴가는 어쩌다 보니 놀토와 주말을 포함해 길게 잡혔다. 그 오랜 권태를 감당할 길이 없어 여행이라도 갈까 했지만 준비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여름휴가 이야기

허용수 한길치과 원장·울산신문 독자권익위원

나이가 드니 피서가기도 귀찮다. 최근 몇 년간은 그저 집에서 뒹굴다가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이나 영화관에서 게으른 휴가를 보내왔다. 그런데 올여름 휴가는 어쩌다 보니 놀토와 주말을 포함해 길게 잡혔다. 그 오랜 권태를 감당할 길이 없어 여행이라도 갈까 했지만 준비한 게 아무 것도 없다.

후배 원장님들은 서울로 호캉스니 일본 북해도니 하며 숙소와 항공편을 미리 예약해 두었단다. 아내는 설마 머리 눕힐 데 없겠냐며 일단 무작정 떠나보잔다. 국도변에는 러브호텔이란 게 있고 이도 저도 안 되면 차박을 하면 되지. 이런 무모한 피서 계획을 세워놓고 출발에 앞서 다시 한번 서로 자문해 보았다. "궁궐 같은 집을 두고 이 땡볕에 무작정 고난의 행군을 나서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을 위하여!" "오케이. 렛츠 고!"

우리는 황금빛 태양 아래 도시의 소음과 빌딩 숲을 벗어나 조용필의 노래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도 없이 7번 국도를 따라 동해안으로 무작정 달렸다. 계획이 없으니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자유, 아무것도 안 할 자유가 있었다. 가다가 물회도 먹고 울진 성류굴의 시원한 냉기도 즐겼다.

호기심에 들른 과학체험관은 젊은 부모와 어린 자녀들을 위한 곳이지 우리 같은 중년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시원한 실내를 둘러보다 4D 영화를 관람했다. 입체 안경을 쓰고 흔들리는 좌석이 잠수정이 되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열대어들과 푸른 산호초의 평화로운 풍경이 눈앞에 잡힐 듯 아득히 펼쳐지는데…. "아! 잤다" 아내의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어느새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있다. 움직이는 좌석이 요람을 흔들 듯 우리를 재운 것이다.

한숨 자고 기운을 차린 우리는 불영계곡에서 캠핑장을 만나 차박을 하기로 했다. 모든 차창을 열어 차량용 모기장을 설치하고 좌석을 평탄화한 뒤 자충 매트를 깔면 멋진 룸이 완성된다. 나무데크엔 그늘막을 치고 캠핑 의자만 내놓으면 그만이다. 더운물 나오는 샤워장에 화장실, 개수대까지 모든 시설이 깨끗했고, 빨래는 타프 줄에 걸어뒀더니 밤새 다 말라버려 일부러 많은 옷을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화려한 호텔 라운지 바는 아니지만 밤하늘의 별빛을 벗 삼아 아내랑 도란도란 맥주캔을 기울이는 행복 속에 휴가의 첫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배롱나무꽃들이 흐드러진 불영사에서 부처님께 합장을 드리고, 동굴의 시원함을 알았기에 삼척에 있는 환선굴을 향했다. 굴 입구까지 걸어서 30분 거리를 모노레일을 타면 5분이라는데 대기 줄이 두 시간이란다. 까짓 30분 가볍게 걷자 했는데 평지가 아닌 엄청난 경사의 산길과 끝 모를 계단 지옥이다. 머리 위를 지나는 모노레일을 보니 더 덥다.

구슬땀을 흘리며 오르고 오르다 마침내 계단 끝 모퉁이를 도는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계절이 확 달라진 거다. 거대한 환선굴 입구엔 냉장고 문을 열고 선 듯 시원한 냉기가 느껴진다. 힘들게 걸어 올라온 사람만이 만끽할 수 있는 황홀감이다. 크고 넓은 동굴 내부는 폭포도 있고 계곡물도 흐르는 천혜의 낙원이다. 여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 아닐까 싶다.

내친김에 강릉까지 올라간 우리는 모텔 같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에어컨도 있고 침대도 있었지만, 아내는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불만이다. 역시 모텔은 남녀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지 자는 곳은 아닌가 보다. 빨래도 밤새 마르지 않아서 다음날 이동할 때 차 안 곳곳에 널어 두었더니 문을 열면 팬티가 대롱거리는 것이 이것도 재미라고 서로 마주 보며 낄낄거렸다. 검색한 맛집은 줄이 길어 포기하고 그저 허기나 면하자고 들른 숙소 근처의 허름한 노포집에서 의외의 맛에 감동을 먹었다.

"이제 어디 갈까?" "무열왕릉이 보고 싶네. 백제로 가자" "무령왕릉이겠지" 이황과 황희가 헷갈리고, 도산서원은 안창호가 세웠다고 답하는 허당미를 지녔지만, 자기는 전생에 왕족이었는지 평소에도 왕릉 답사에 관심이 많다던 마님다운 결정이다.

그길로 우리는 대관령을 넘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내륙으로 내달아야 하지만, 뭐 어때? 바쁠 일 있나? 대관령은 서늘한 안개 속에 기온은 22도. 일본 북해도 보다 더 시원할 것 같았다.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감기들 것 같아 긴 옷을 껴입어야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뻔한 음식들도 여행 중에는 뭐든 다 맛있다.

에어컨 빵빵한 박물관도 피서지로 손색이 없었다. 젊은 엄마가 깨진 유물 앞에서 아무 관심도 없는 어린 자녀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난다. 옛날 우리의 모습이다. 이제 장성해 곁을 떠났지만 우리는 젊은 날 아이들과 함께 왔던 장소들을 다시금 되짚으며 추억을 되새긴다. 세종시의 교과서박물관에서도 철수, 영희, 바둑이와 내 유년의 기억을 나누었다.

세종시에서는 럭셔리한 진짜 호텔에서 편안히 자고 조식 뷔페를 먹었다. 세종시는 도심 인프라가 잘 정비된 깔끔한 계획도시였다. 여러 부처의 건물들이 물결처럼 거대하게 하나로 연결된 정부청사 건물도 인상적이다. 수도권은 미어터지고 지방은 소멸된다는데 이렇게 잘 마련된 곳으로 왜 수도 이전을 안 하냐며 급기야 우리 부부는 국가의 균형 발전에까지 대화의 장을 넓혀갔다.

검색과 예약이 일상화되면 실수할 확률은 낮지만, 사고가 갇히고 모험심이 줄어든다. 그리고 의외의 곳에서 발견하는 우연한 행운을 알지 못한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도 다 그런 거다. 플레밍이 곰팡이에서 항생제를 발견한 것도, 뉴튼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도 다 우연한 세렌디피티 덕분이다. 계획도 예약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난 무모한 여행이지만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한 진정한 휴가로 기억될 것 같다.  허용수 한길치과 원장·울산신문 독자권익위원

허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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