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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김현우의 핫스팟] 통제 벗어난 진보 의제의 역습···스스로 무덤 판 ...

펜듈럼은 주인을 가리지 않는다 테크 브로들이 돈과 명분을 대며 키워낸 흐름은 이내 독립된 집단 에너지 즉... 일론 머스크와 젠슨 황 등 일명 '테크 브로'들은 시장·성장·자본 축적에 기반해 존재하면서도 공개...

[김현우의 핫스팟] 통제 벗어난 진보 의제의 역습···스스로 무덤 판 ...

'핫스팟(HotSpot)'

호주 토끼판 된 실리콘밸리

빅테크 친환경 의제의 부메랑

통제 벗어난 펜듈럼의 역습

AI 전력난 자초한 테크 브로

"중간만 가자."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처세술을 조기 이수한 우리는 영혼 없는 끄덕임과 '모르는 척'으로 무장한 생존의 고수들이다. 퇴근길 소주 한 잔에 "오늘도 버텼다"며 스스로를 마취하고, "받은 만큼만 일한다"며 핏대 세우는 걸 훈장처럼 여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공했다는 이들의 삶은 왜 우리와 이토록 딴판일까. 어쩌면 우린 그저 거대한 '펜듈럼(Pendulum)'의 진동판 위에서 시키는 대로 춤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공력을 낭비하며 '잉여 포텐셜'을 공급하는 건전지 신세로 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 교과서 대신, 왜 이 지겨운 장면이 무한 반복되는지 그 메커니즘이 궁금했다. 내게 그 프리즘을 빌려준 바딤 젤란드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의 '트랜서핑' 이론을 메스 삼아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김현우의 핫스팟]을 시작한다.

테크 거물들이 이미지 포장을 위해 키운 진보·친환경 의제가 AI 시대 전력 수요 및 일자리 위협과 충돌하며 치명적인 부메랑이 됐다. 얄팍한 도덕적 위선을 멈추고, 기술을 통한 실질적 생산성 향상과 경제 기여라는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 결과로 증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챗GPT 제작 이미지

1859년 호주에 정착한 영국인 부호 토마스 오스틴은 고향의 사냥 놀이가 몹시 그리웠다. 그는 심심풀이 삼아 야생 토끼 24마리를 들여와 자기 영지에 풀었다. "가끔 총 쏘는 맛이나 즐기기 딱 좋겠지". 그의 계산은 어리석었다. 천적이 없던 호주 대륙에서 토끼들은 특유의 경이로운 번식력을 자랑하며 불과 몇 년 만에 수천만 마리로 불어났다. 호주 대륙의 생태계가 초토화된 것은 물론 오스틴 자신의 농장마저 쑥대밭이 됐다. 자기가 쏘는 총알보다 토끼가 새끼를 치는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구글 메타 애플 오픈AI 등을 이끄는 기술 거물들은 현실 세계마저 자기들이 코딩하듯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진보적 의제·환경주의 절대주의·정체성 정치·반기업 정서라는 토끼들을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영지에 풀어놓고 막대한 정치 자금과 알고리즘으로 넉넉히 먹이까지 챙겨줬다.

처음엔 그림이 꽤 그럴듯했다. 우리는 낡은 월스트리트의 탐욕스러운 자본가들과 달라 우리는 지구와 미래를 위해 싸우는 착한 부자야라는 자기 서사가 가능했다. 훌륭한 이미지 마케팅이었다. 그러나 바딤 젤란드의 <트랜서핑>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펜듈럼은 주인을 가리지 않는다

테크 브로들이 돈과 명분을 대며 키워낸 흐름은 이내 독립된 집단 에너지 즉 펜듈럼으로 거대하게 자라났다. 펜듈럼은 개인의 선의나 의도 따위는 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을 살찌울 에너지만 흡수할 뿐이다. 펜듈럼이 일단 몸집을 불리고 나면 매일 밥을 주던 주인의 손가락마저 망설임 없이 물어뜯는다. 이들이 범한 세 가지 치명적인 착각은 다음과 같다.

<트랜서핑>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중요성 과잉이다. 자신들의 자본과 지능이 정치 현실보다 우위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분노·계급 감정으로 뭉친 정치 펜듈럼은 코드 몇 줄로 제어할 수 없었다. 부자는 더 내야 한다거나 거대 기업이 사회를 착취했다는 매서운 구호 앞에서 이들이 과거에 낸 두툼한 후원금 영수증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이들은 진보적 가치를 세련되게 소비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초부유층의 생활 방식을 단 하루도 포기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친환경을 부르짖으며 퇴근은 전용기로 한다. 노동의 미래를 걱정한다면서 뒤로는 인공지능 투자를 늘리며 대규모 감원의 칼춤을 춘다. 다양성을 말하면서 플랫폼의 권력은 더 지독하게 독점한다. 트랜서핑의 거울은 구호가 아니라 그들의 실제 상태를 반사한다. 대중은 번지르르한 말보다 위선적인 불일치를 귀신같이 먼저 알아챈다.

한때 실리콘밸리는 혁신과 일자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로 국면이 바뀌자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내 일자리를 빼앗고 데이터를 빨아먹는 자동화의 사신으로 인식된다. 현실선이 통째로 바뀐 것이다. 같은 기업과 같은 최고경영자라도 집단 인식의 좌표가 이동하면 전혀 다른 지옥문이 열린다.

인공지능과 에너지 역설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지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최근 불거진 에너지 역설이다. 일론 머스크와 젠슨 황 등 일명 '테크 브로'들은 시장·성장·자본 축적에 기반해 존재하면서도 공개 무대에서는 반자본주의적 언어와 친환경 절대주의 펜듈럼에 열심히 춤을 춰왔다. 자기 존재 기반과 전혀 다른 진동수를 뿜어낸 셈이다.

문제는 인공지능 패권 경쟁이 곧 전력 경쟁이라는 데서 터졌다. 데이터센터는 거대하게 전기를 집어삼킨다. 값이 싸고 안정적인 전력망이 필수적인데 그동안 기술 거물들이 지갑을 열어 정성껏 키워놓은 친환경 펜듈럼이 화석연료·원전·산업용 전력 인프라 확장을 가로막고 섰다. 자기가 밥을 줘서 키운 사나운 개가 자기 집 대문을 막고 짖어대는 꼴이다.

샘 올트먼 같은 인물이 집중 공격의 표적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계 내부에서는 그를 문명을 도약시킬 천재로 떠받들지만 지역 사회와 노동 시장에서는 그저 내 밥그릇을 위협하는 불안의 씨앗일 뿐이다. <트랜서핑>에서 불안은 펜듈럼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드는 최고급 연료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만만한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고 결국 대저택에 살며 수백억 원의 주식 보상을 챙기는 거대 기술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얼굴에 정확히 조준점을 맞췄다. 인류의 미래를 만든다는 그들의 고상한 변명은 당장 내 현실을 빼앗기게 생겼다는 대중의 생존 본능 앞에서 앙상하게 부서진다.

결국 테크 브로들의 현재 위기는 얄팍한 정치 감각과 현실선 관리의 참사다. 싸울수록 펜듈럼은 그 저항 에너지를 먹고 더 거대해질 뿐이다. 억만장자가 피해자인 척을 하네라는 차가운 조롱만 새로운 연료로 추가될 뿐이다.

해결책은 하나다. 잔뜩 들어간 어깨의 힘을 빼고 진짜 자기 현실선으로 묵묵히 돌아가는 것이다. 도덕적 군자 행세를 멈추고 기술이 어떻게 실질적인 생산성을 높이고 전력 인프라를 혁신하며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는지를 빈말이 아닌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

테크 브로들은 코딩 몇 줄로 세상의 규칙을 바꿨다고 자랑해 왔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능력과 그 바뀐 세상에서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는 능력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펜듈럼을 조종하고 있다고 믿었겠지만 큰 착각이다. 펜듈럼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을 알뜰하게 부려먹고 있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내보냈던 위선적인 파동이 거울을 한 바퀴 빙 돌아 마침내 제 주인에게 청구서를 내민 것일 뿐이다.

☞ 펜듈럼(Pendulum): 러시아 물리학자 바딤 젤란드의 <트랜서핑> 이론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에너지가 모여 만들어진 독립적인 구조체를 뜻한다. 개인의 의도를 벗어나 스스로 몸집을 불리는 특성이 있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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