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기획] 주사기도 라면도 종량제 봉투도 — 나프타가 멈추면 멈추는 것들

정부는 의료용품과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석유화학 제품을 핵심 분야로 지정하고, 수급 불안 시 우선 공급하는 긴급수급조정 체계를 가동하기로 했다.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 등 중간재는 물론 수액백, 포장 용기 등...

[기획] 주사기도 라면도 종량제 봉투도 — 나프타가 멈추면 멈추는 것들

호르무즈 봉쇄 47일째, 비닐 공장 가동률 15퍼센트 감축에서 의료용 수액백 수급 불안까지

정부, 오늘 자정부터 석유화학 원료 7종 매점매석 전면 금지

중동 지역에서의 갈등 확산으로 인해 원유 및 나프타 공급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연합뉴스

[공감신문] 정재은 기자=하루 50톤의 비닐봉지를 찍어내던 경기도의 한 비닐 제조 공장이 생산량을 15퍼센트 줄였다. 원료인 폴리에틸렌 가격이 50퍼센트 뛰었기 때문이다. 컵라면 용기와 식품 포장재를 만드는 스티로폼 공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원료값 인상분을 납품가에 다 반영하지 못하면서 적자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원유에서 추출하는 나프타는 비닐, 플라스틱, 스티로폼의 어머니다. 한국 석유화학 업계가 사용하는 나프타의 절반가량을 중동에서 들여왔는데,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이 공급선이 끊겼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 대형 석유화학 업체들은 나프타 분해시설, 이른바 나프타크래커의 가동률을 이미 줄이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나프타가 멈추자,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자정을 기해 정부의 긴급 조치가 발동됐다. 산업통상부와 재정경제부는 15일 0시부터 석유화학제품 원료 등의 매점매석 금지 및 긴급수급조정에 관한 규정을 고시하고 즉각 시행에 들어갔다. 나프타에서 생산되는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벤젠, 톨루엔, 자일렌, 기타 유분 등 7개 기초 유분이 대상이다. 이들 원료를 취급하는 사업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재고량을 80퍼센트 초과해 보관할 수 없게 됐다. 6월 30일까지 시행되며, 수급 불안이 지속될 경우 정부는 해당 품목의 생산량, 출고량, 판매량을 긴급 조정할 수 있는 권한도 확보했다. 앞서 나프타에 한정됐던 관리 범위를 석유화학 전반으로 확대한 것으로, 관세청은 지정 품목의 수입 신고가 30일 안에 이뤄지지 않을 경우 지연 기간에 따라 최대 2퍼센트의 가산세를 부과한다.

이 7개 기초 유분이 왜 중요한가를 이해하려면 나프타에서 시작되는 산업의 가지치기를 따라가봐야 한다. 나프타를 고온에서 분해하면 에틸렌과 프로필렌이 나온다. 에틸렌은 폴리에틸렌이 되어 비닐봉지, 종량제 봉투, 랩, 식품 포장 필름으로 변한다. 프로필렌은 폴리프로필렌이 되어 컵라면 용기, 의료용 주사기, 수액백, 자동차 내장재로 탈바꿈한다. 부타디엔은 합성고무의 원료가 되고, 벤젠은 나일론과 합성세제의 출발점이다. 톨루엔과 자일렌은 페인트, 접착제, 합성섬유의 기초 재료다. 결국 나프타 하나가 멈추면 병원의 수액 세트부터 편의점의 컵라면, 마트의 비닐봉지, 택배 포장재, 농업용 멀칭 비닐, 화장품 용기까지 동시다발로 흔들리는 구조다.

현장의 충격은 이미 가시화됐다. 서울 중구 방산시장의 포장재 매장에서는 일부 위생봉투와 비닐 제품이 품절됐다. 편의점 업계에서도 비닐봉지 가격과 물량에 비상이 걸렸다. 종량제 봉투 대란 우려가 번지면서 일부 지자체에서는 1인당 구매 수량을 제한하고 비축 물량을 시장에 풀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내 정유사가 수출하던 나프타와 석유화학 물량 일부를 내수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나프타 수입단가 차액 보조를 통해 공급 확대에 나서고 있다. 농업용 비닐 가격 급등에 대해서는 154억 원 규모의 추경 예산을 편성해 긴급 지원에 나섰다.

가장 민감한 영역은 의료다.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드는 주사기와 수액백은 병원에서 매일 소비되는 필수 의료 소모품이다. 수급 차질이 발생하면 환자 안전에 직결된다. 정부는 의료용품과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석유화학 제품을 핵심 분야로 지정하고, 수급 불안 시 우선 공급하는 긴급수급조정 체계를 가동하기로 했다.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 등 중간재는 물론 수액백, 포장 용기 등 최종 제품까지 수급 상황을 일일 단위로 점검하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나프타 등 개별 품목 대응을 넘어 석유화학 공급망 전반을 촘촘하게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며 "국민 생활과 핵심 산업에 공급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비상 체계를 갖추겠다"고 밝혔다.

이번 위기는 역설적으로 탈석유 전환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프타 의존도가 높은 종량제 봉투 시장에서는 재생 원료 기반의 봉투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일부 지자체는 재생 폴리에틸렌을 활용한 종량제 봉투 생산 라인을 확대하고 있으며, 기업들 사이에서도 친환경 포장재로의 전환이 빨라지고 있다. 대기업은 나프타 쇼크를 버틸 재고와 자금 여력이 있지만, 원료 가격 인상을 납품가에 즉시 반영하기 어려운 중소 비닐, 플라스틱 제조업체들은 이미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재생 원료 비중을 높이려면 설비 교체가 필요하고, 그 비용과 시간이 중소기업에는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 구조다.

당정은 전체적으로 석유화학 제품의 공급에 큰 차질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현장의 체감은 다르다. 하루 50톤을 찍어내던 비닐 공장 대표는 "납품 차질이 불가피하고 공장 가동 중단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고, 스티로폼 제조업체 대표는 "원료가 오른 만큼 가격에 반영을 못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국회 중동전쟁 경제대응 특별위원회에서도 주사기, 수액세트, 라면 포장재, 종량제 봉투 등 일부 품목의 수급 병목 현상이 확인돼 일일 모니터링 체계를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4~5월 원유 확보량은 예년 대비 60퍼센트 수준이며, 추가 물량 확보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

원유 한 방울에서 시작되는 석유화학의 나무는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가지와 연결돼 있다. 호르무즈가 열리지 않는 한 이 나무의 뿌리는 계속 마를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는 매점매석 금지와 내수 전환, 긴급수급조정으로 버텨야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나프타 수입 의존도를 낮추는 구조적 전환이 불가피하다. 석유화학 공급망 연구를 전공한 서울 소재 대학 화학공학과 교수는 "한국 석유화학 산업은 중동 나프타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며 "이번 위기를 계기로 바이오 나프타, 열분해유 등 대체 원료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재생 원료 기반 생산 체계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