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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0억달러짜리 지도를 200달러에

사실상 독점적으로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만드는 네덜란드의 ASML은 삼성전자, TSMC 등 글로벌 반도체기업도 줄을 서게 한다. 이렇듯 첨단 산업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장비가 서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구현장에서...

[기고] 30억달러짜리 지도를 200달러에

김광표 경희대 응용화학과 교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프로젝트 중 하나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 1990년 시작 당시, 한 명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는 데 13년과 30억 달러가 들었다. 지금은 200달러, 하루면 끝난다. 이 기적은 생물학자의 통찰이 아니라 미국의 ‘NGS(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라는 장비였다. 하드웨어의 정밀함과 소프트웨어의 지능이 결합된 순간, 현대 바이오의 패권은 사실상 미국으로 넘어갔다. 사실상 독점적으로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만드는 네덜란드의 ASML은 삼성전자, TSMC 등 글로벌 반도체기업도 줄을 서게 한다. 이렇듯 첨단 산업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장비가 서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구현장에서 쓰이는 주요 측정·분석 장비의 국산화율은 16%에 불과하다. 나머지 84%는 미국 독일 일본 등이 만든 것이다. 몇 년 전까지는 “잘 만든 외산 장비를 사서 쓰면 된다”는 말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연구장비를 둘러싼 글로벌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미국은 17개 국립연구소를 총동원해 AI·슈퍼컴퓨터·첨단장비를 하나의 폐쇄 루프로 연결하는 ‘제네시스 미션’을 추진 중이다. 장비를 ‘쓰는’ 나라를 넘어 장비로 세상을 ‘설계하는’ 나라가 되겠다는 구상이다. 중국은 자국 스타트업이 개발한 노광장비를 시험 가동하며 장비 국산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일본은 국산 장비에서 나온 연구 데이터를 AI로 연결하는 ‘장비→데이터→AI’ 가치사슬 전체를 국가 전략으로 설계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산 장비에 의존하는 것은 남의 밭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대의 첨단 장비는 하드웨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데이터를 해석하는 알고리즘, AI와 연동되는 인터페이스까지 갖춰야 ‘진짜 장비’다. 장비 자립화의 진짜 이유는 싸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데이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세계적으로 AI와 로봇이 실험 전 과정을 자동 수행하는 ‘자율주행 실험실(SDL)’이 부상 중이다. SDL의 심장도 결국 장비다. 장비의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고 데이터 흐름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어야만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다.

가능성은 이미 보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한 미래선도연구장비 핵심기술개발사업을 통해 오가노이드 기반 신약 스크리닝 장비로 210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기업이 나왔고, AI를 접목한 뇌파 측정기는 ‘CES2025’ 혁신상을 받았다. ASML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십 년간 대학·연구소의 원천기술이 기업으로 흘러들고, 수많은 실패를 극복한 생태계의 승리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 생태계다. 숫자 목표를 내세우는 선언보다, 장비를 잘 만들 수 있는 사람과 기업을 키우는 것이 먼저다. 우리가 직접 설계한 장비 위에서 독창적인 데이터가 흐르고 그 데이터가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로 이어질 때, 대한민국은 기술 추격국을 넘어 미래의 설계자로 거듭날 것이다. 장비를 만드는 나라가 미래를 만든다.

김광표 경희대 응용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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