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수필] 윤슬이 머무는 자리
이종순
이종근
2026년 06월 25일 16:35
승인
2026년 06월 25일 20:29
인생이라는 이름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대한 풍랑 앞에 돛을 내리고 망연자실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어제까지는 잔잔했던 수평선이 오늘은 나를 집어삼킬 듯 포효하고, 애써 잡고 있던 키마저 손아귀에서 미끄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이 나의 통제 밖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 무력감은 발등을 적시는 바닷물처럼 차갑고도 무겁다.
하지만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결코 폐허로만 남지는 않는다. 비바람이 휩쓸고 간 수면 위로 다시 햇살이 내려앉을 때, 그곳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찬란한 빛의 잔치, ‘윤슬’이 피어난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역설적으로 이 빛의 보석들은 수면이 평온할 때보다, 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부서질 때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찬란하다.
우리의 삶 또한 이와 닮지 않았나 싶다. 평탄한 길을 걸을 때는 내가 가진 빛이 얼마나 고왔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고난이라는 바람이 불어와 마음의 호수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조각난 슬픔과 시련의 파편들이 햇살과 만나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어둠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작은 희망의 빛줄기가 우리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는가를 묵도(默禱)하는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언젠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홀로 바닷가를 찾았던 적이 있다. 당시 나에게 닥친 시련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과 같았다. 무너진 자존감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나는 더 이상의 나아갈 힘이 없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바위에 몸을 부딪치며 하얗게 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깨어진 물방울들이 햇살을 머금는 순간, 바다는 마치 수천수만 개의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부서져야 빛이 난다는 것. 그것은 자연이 나에게 건넨 고요하지만 강렬한 위로였다. 고통은 나를 파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빛을 일깨우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시련의 물결이 세차게 일수록 윤슬은 더 넓게 퍼져 나간다. 고난의 파도가 내 삶을 흔드는 이유는 나로 하여금 더 넓고 깊은 빛을 품게 하기 위함이다.
신문 지면을 통해 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 당신의 삶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찬란한 윤슬을 빚어내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는 증거다. 상처 입은 조개만이 진주를 품듯, 부서진 마음의 틈새로만 비로소 희망의 빛은 스며든다.
인생의 길목에서 마주한 돌부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하는 디딤돌이다. 닥쳐온 시련을 이겨내는 힘은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의 슬픔을 빛으로 바꾸려는 의지, 즉 흔들리는 수면 위에서도 끝내 햇살을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에서 비롯된다.
오늘 당신의 하루가 고단했더라도, 저무는 노을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에 ‘윤슬’ 하나를 정성껏 띄워 보내시길 바란다. 시련은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일 뿐이지만, 그 바람이 남긴 빛의 흔적은 당신의 영혼을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빛내줄 것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빛나듯, 파도가 높을수록 당신의 윤슬은 더욱 장엄하게 빛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바다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당신의 바다에 오늘, 가장 눈부신 윤슬이 머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굽이진 길 끝에서 만날 그 찬란한 빛이 당신을 다시 걷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기를 바란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예사조'로 수필 등단, '시조문학'으로 시조시인 등단
문학박사. 우석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한국국보문학 시조부문 대상 수상
교육부 유보통합 연구진 교육부장관상 수상
'창의 숲 연구소'와 '아이가 크는 숲' 대표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