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노트북에 쓰던 저전력D램, AI의 주역으로 부상
HBM이 '초고속 화물열차'··· 소캠은 '배달부'
면적 60%↓, 전력효율 70%↑, 저발열
AI의 무게중심이 학습에서 추론으로 이동하면서, 소캠이 떠오르고 있다./그린포스트코리아 그래픽
지난 16일(현지시간) 초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엔비디아의 GTC 2026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HBM4 모형에 쏠렸다. 그런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부스 한켠, 손바닥만 한 모듈 앞에도 방문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바로 소캠2(SOCAMM2·Small Outline Compression Attached Memory Module 2)였다. AI 반도체 시장의 서사가 학습에서 추론으로 이동하는 지금, 소캠2가 미래 인공지능의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
◇추론과 전력, AI의 새 기준이 되다
AI의 진화는 단선적이지 않았다. 지난 수 년간 시장의 눈은 오직 HBM 공급 물량과 수율, 납기일에 고정돼 있었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H100에 HBM3를 납품하며 '슈퍼사이클'에 먼저 올라탔다. 이어 삼성전자가 추격하고, 마이크론이 뒤를 따르는 3강 구도가 펼쳐졌다. 그러나 AI의 무게중심이 학습에서 추론으로 이동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메모리의 덕목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습은 속도가 생명이다. 수백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GPU에 쏟아붓는 과정에 HBM은 거미줄같은 도로망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추론은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다. 고객이 원하는 물건을 빠르게 파악해 전달하는 배달부 역할이다. 이 단계에서 전기료가 수익성을 직접 결정한다. 챗GPT 수준의 서비스 하나를 돌리는 데 들어가는 추론 전력은 검색 쿼리의 수십 배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더 빠른 칩이 아니라, 더 싼 전기가 AI 경쟁의 새로운 전선이 된 것이다.
소캠2가 그 전선의 한가운데 섰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에서 검증된 저전력 D램인 LPDDR5X를 복수로 묶어 하나의 모듈로 구성한 것이 소캠2다. 사용자가 종일 손에 들고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핵심은 '저 전력 소모'와 '저 발열'이다. 거기에 최적화된 D램을 변신시킨 것이다. 기존 서버용 메모리 모듈(RDIMM) 대비 탑재 면적은 60% 이상 줄고, 전력 효율은 50~70%가량 높아진다. 소켓 삽입 방식을 버리고 메인보드에 직접 압착(Compression)하는 구조적 혁신도 더해졌다. 같은 전기로 빠르게 더 많은 AI 응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엔비디아의 선택은 소캠2
시장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엔비디아의 선택이었다. 차세대 AI 플랫폼 '베라 루빈(Vera Rubin)'을 설계하면서 엔비디아는 베라 CPU의 메모리 솔루션으로 소캠2를 낙점했다. CPU와 메모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전력 예산을 최적화하는 과제의 해답이 바로 소캠이었다.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소캠2 연간 물량은 200억Gb(기가비트)에 달한다. 서버 한 대에 들어가는 LPDDR5X 용량이 프리미엄 스마트폰 수십 대 분량과 맞먹는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전유물이었던 LPDDR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데이터센터라는 '신대륙'을 만난 셈이다. 이 수요는 곧바로 가격 생태계를 뒤흔든다. 시장조사업체들은 2026년 말 LPDDR5X 가격이 전년 대비 30~50% 이상 급등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서버용 수요가 스마트폰용 공급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현상이 현실화하면서, 스마트폰 제조사들의 조달 비용 압박은 구조적으로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반도체 3강의 생존 방정식
200억Gb라는 파이를 두고 메모리 3강의 전략이 맞부딪히고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까지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GTC 2026에서 엔비디아 전용 갤러리를 별도 구성하고 소캠2를 베라 루빈 플랫폼의 핵심 부품으로 공식 전시했다. 엔비디아의 커스터머 샘플(CS) 테스트를 통과하고, 전체 200억Gb 가운데 100억Gb를 독점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10나노급 5세대(1b) D램의 안정적인 수율, 이미 업계 최초로 192GB 소캠2 양산에 돌입한 공급망 장악력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에서 구축한 신뢰를 소캠으로 전이시키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 중이다. CES 2026에서 서버 특화 소캠2를 공개했고, 1c(10나노급 6세대) 공정 전환을 통해 제품군 확대를 예고하고 있다. 현재 추정 수주 물량은 60억~70억Gb 수준으로 거론된다.
변수는 마이크론이다. '만년 3위' 마이크론은 세계 최초로 256GB 소캠2 고객 샘플을 출하하며 기술 역전의 신호탄을 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내세운 192GB보다 33% 높은 용량이다. 소캠2의 전신인 소캠1 시장에서 엔비디아 승인을 가장 먼저 받았으나 규격 전환 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었던 마이크론으로서는, 이번 256GB 승부수가 단순한 제품 발표가 아닌 판세 역전의 시도다.
◇포스트 HBM? ··· HBM과 함께!
소캠의 부상이 HBM의 퇴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AI 학습용 거대 클러스터에서 HBM의 수요는 여전히 견고하다. HBM4·HBM4E로의 세대 전환도 진행 중이다. 소캠은 HBM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 인프라의 또 다른 층위를 채우는 보완재다. HBM이 대량의 화물을 나르는 초고속열차라면, 소캠은 그 내용물 고객에게 싸고 빠르게 전달하는 유능한 배달부다.
그러나 시장의 구조는 이미 바뀌고 있다. AI 추론 시장이 커질수록, 소캠의 역할이 더욱 빛나게 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과 소캠2를 동시에 생산하는 'AI 메모리 풀 패키지' 공급 능력을 증명했다는 것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차세대 시장을 선점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메모리 기업들에게 소캠은 단순한 신제품이 아니라, 다가올 AI 인프라 사이클에서 생존과 성장을 결정할 전략적 승부처다.
신경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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