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없는 약속
지방선거 전후로 언론은 앞다투어 후보자들의 ‘공약’을 집계하고 점수를 매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후보가 내건 공약은 애초에 실현 가능하고 타당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생략한 채 진행된다. 지방자치는 역할이 분명하게 나뉜다. 그러나 선거공보를 펼쳐보면 같은 지역의 시장·도의원·시의원 후보가 비슷한 개발 공약을 내세우고, 중앙정부의 권한이 필요한 사업까지 자신의 약속인 것처럼 제시하는 모습도 적지 않다. 지방선거는 중앙정치의 축소판이 아니다. 지역의 문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해결할 사람을 뽑는 과정이다. 이에 ‘누가, 무엇을, 어디까지 약속할 수 있는가’라는 지방자치의 기본 원칙을 다시 묻는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 사진=ChatGPT
“수원 경제자유구역 추진 및 R&D 사이언스파크 조성” (수원시장 후보)
“수원 경제자유구역과 첨단 R&D 사이언스파크 추진” (수원 지역 도의원 후보)
“수원 경제자유구역 지정” (수원 지역 시의원 후보)
지방선거 출마 후보자들이 유권자 안방으로 배달한 선거 공보물의 일부다.
출마한 선거의 종류도, 당선 시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권한과 예산의 범위도 완전히 다른 후보들이지만, 공약집에 들어간 공약과 개발 청사진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본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도내 31개 시군 민선9기 후보자들의 선거 공보물을 비교한 결과, 시장·광역의원(도의원)·기초의원(시의원)들이 동일한 대형 개발사업을 핵심 공약으로 공유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수원시의 경우, 시장 후보가 ‘수원 경제자유구역 추진’과 ‘탑동 이노베이션밸리 조기 완공’을 핵심으로 내세우자, 도의원 후보들 역시 동일한 대형 개발 사업을 주요 공약으로 채택했다.
시의원 후보들 또한 시장·도의원의 거시 담론을 구 단위 개발 사업으로 연결하며 사실상 공약을 공유했다.
광명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장 후보는 광명·시흥 3기 신도시와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핵심 성장 전략으로 내세웠다.
도의원 후보는 AI·미래차·바이오 산업 육성과 광역철도망 구축을 약속했고, 시의원 후보 역시 경제자유구역 지정과 테크노밸리 기업 유치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결국 모든 후보가 ‘3기 신도시 개발’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사업을 각자의 공약집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안성에서는 반도체와 미래 모빌리티가 공약의 중심이었다.
시장 후보는 반도체 소부장 특화단지와 미래 모빌리티 메가특구를 제시했고, 도의원 후보는 반도체 캠퍼스 조성과 미래 모빌리티 배터리 산업 유치를 약속했다.
시의원 후보 역시 각 면 단위로 미래 모빌리티 특구 조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같은 산업 전략을 공유했다.
이 같은 현상은 남양주시(왕숙신도시 개발)와 김포시(광역교통망 구축)에서도 되풀이됐다.
문제는 이러한 거시 공약의 대다수가 지방의원(도·시의원) 개인이 법적으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아득히 초월한다는 점이다.
시장과 도지사는 실제 행정과 예산 집행의 주체지만, 도의원과 시의원의 법적 권한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공약집만 보면 누가 집행기관이고 누가 견제기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약속이 반복된다.
시도의원 후보들은 자신이 마치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수천억 원의 국·도비를 직접 끌어올 수 있는 것처럼 ‘산단 조성’, ‘철도망 신설’,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공약집 전면에 도배하고 있다.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진짜 법적 권한인 ‘조례 발의’나 ‘행정 감사’ 공약은 대형 개발 공약의 그늘에 가려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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