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두 (사)한국빅데이터협회 부회장.
작금의 AI 시대에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패권 다툼의 근원은 기술의 속도나 우위를 점하는 것보다 누가 먼저 AI 관련 법규와 규칙을 정하느냐는 거대한 시스템 경쟁에 달려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한동안 미국의 빅테크들이 기술을 독점하며 펜스를 높이 쌓는 데 몰두해 왔다. 그러는 동안에 중국은 꾸준히 그들의 거대 경제권 구상인 일대일로(一带一路)를 기반으로 하여 오픈 모델을 무기로 저변을 확대해 왔다. 중국의 AI 산업의 모멘텀(momentum)은 한마디로 기술 혁신에 두기보다는 규범을 선점하는 데 전력해 온 것이다.
중국이 추진하는 개방형 생태계는 기술의 자선 사업이 아니라 자국의 오픈 모델 AI를 내세워, 이에 최적화된 화웨이의 어센트 칩, 마인드 스포어 프레임워크 그리고 통신 인프라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번들(bundle)로 묶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포섭한다는 전략이다. 중국의 모멘텀 실체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아니라, 전략적 모호성을 활용해 글로벌 규범 담론을 선점하고, 자국의 기술을 국제 표준으로 고착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방책이다. 더구나 중국의 오픈 모델은 엄밀히 말해 오픈소스가 아니라 오픈 가중치(open weight) 모델이다.
반면에 미국은 폐쇄성을 전략적 주도권 기획으로 삼는다. 미국의 폐쇄성은 압도적인 기술 우위에 기초하여 글로벌 리더십을 제도화하려는 지정학적 설계의 결과로 평가된다. 미국은 현재 국가 AI 연구 자원(NAIRR, National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 Resource) 2.0을 통해 연구 자원을 국유화하고 있다.
아울러 그래픽처리장치(GPU) 선물 계약 구조를 만들어 연산력을 금융 자산화하고 있으며, FAST-41로 데이터센터 인프라 또한 전시 속도로 구축한다. 흔히들 AI 경쟁을 속도와 성능으로만 평가하지만, 실제 AI 전쟁은 규범에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AI 실행계획(AAP)을 통해 ‘검열 없는 자유 표현 AI’를 민주 진영의 표준으로 설정하려 한다. 이에 반해 중국은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워 통제하고 검열할 수 있도록 AI를 권위주의 진영의 표준으로 선점하려 한다. 이처럼 세계는 단일한 기술 시장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AI 평화라는 의미인 ‘AI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와 중국 중심의 ‘일대일로’ 그리고 EU의 ‘규제 중심 질서’로 다중 분화되고 있다.
특히 하드웨어와 플랫폼 기업이 부재한 EU는 스스로 심판관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EU는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규제법인 ‘AI 법’을 발효시키며, 기술이 아닌 규범으로 시장을 통제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고위험 AI에 대한 강력한 규제, 투명성 의무, 그리고 탄소 배출 기준을 무기로 규제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과도한 규제가 혁신 기업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내부 비판과 규제 권력이 실제 기술 권력으로 치환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그럼에도 EU는 가치와 인권을 앞세워 미‧중의 기술 폭주를 견제하는 규범 초강대국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규범으로 초강대국의 지위를 고수하려면 무엇보다 월드 모델의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LLM은 학습이 비용의 90퍼센트를 차지하지만, 월드 모델은 실시간 예측과 제어를 반복하는 추론이 비용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의 신경망처리장치(NPU, Neural Processing Unit)가 끼어들 공간이 확보된다. 우리나라 AI 기업 리벨리온이나 퓨리오사AI의 NPU는 GPU보다 전력 효율성이 월등히 높다.
실제로 리벨리온은 자사 아톰(ATOM) NPU로 엔비디아의 코스모스 모델을 구동해 더 빠르고 효율적임을 입증한 바 있다. 월드 모델 시대, 우리나라는 데이터뿐만 아니라 추론 칩에서도 주도권을 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승부처는 텍스트 기반의 범용 LLM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가장 잘하는 제조 데이터에 기반한 월드 모델이다. 이처럼 AI의 미래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에서 물리 법칙을 이해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AI 지형도에서 독특하고 강력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반도체라는 하드웨어의 뿌리부터 최종 서비스라는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AI 가치 사슬의 전 과정을 우리나라는 우리의 기술만으로 완결할 수 있는 AI 풀 스택(Full Stack) 보유국이기도 하다. LLM을 독자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할 수 있는 원천 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HBM 및 AI 반도체 제조 역량 그리고 전 국토를 연결하는 초고속 통신망과 클라우드 인프라를 동시에 갖춘 나라는 아직껏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한 국가다.
이제 AI 패권의 경쟁 개념과 문법이 누가 더 똑똑한 단일 모델을 가지느냐의 싸움에서 누가 더 다양한 지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생태계 전반을 장악하느냐의 경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기회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그동안 꾸준히 구축해 온 인프라를 근간으로 AI 선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적이고 자랑스러우며, 국격(國格)이 날로 상승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요즈음이다.
*구병두((사)한국빅데이터협회 부회장/ 전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주)테크큐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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