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과학과 민주의 길, 팡리즈의 유산

1988년 5월4일 중국 반체제 인사이자 천체물리학자 팡리즈가 베이징대학 교정에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에서 근대화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취지로 연설하고 있다. 이날은 중국의 애국운동이자 ‘과학’과 ‘민주’를 내세운 신문화운동이었던 5·4 운동 69돌 기념일이었다.

1988년 5월4일 중국 반체제 인사이자 천체물리학자 팡리즈가 베이징대학 교정에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에서 근대화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취지로 연설하고 있다. 이날은 중국의 애국운동이자 ‘과학’과 ‘민주’를 내세운 신문화운동이었던 5·4 운동 69돌 기념일이었다. 에드워드 낙트리브 알라미

광고

1989년 1월6일, 천체물리학자 팡리즈(1936~2012)는 1987년에 폭발한 초신성에 관한 논문을 탈고했다. 같은 책상에서 이번에는 편지 한통을 쓰기 시작했다. 천상의 이변이 보고되면 황제가 대사면을 내리던 옛 전통을 떠올린 그는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정치범 석방을 요청했다.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해 봄 천안문의 비극이 뒤따랐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중국 과학기술은 국가 주도의 효율성, 막대한 재정 지원, 그리고 정치에 침묵하는 대가로 극진히 우대받는 과학기술인, 요컨대 권위주의적 기술관료주의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이 통념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들어맞지 않는 과학자도 엄연히 존재했다. 과학의 이름으로 국가에 복무하는 대신, 과학의 이름으로 국가에 물음을 던진 사람. 팡리즈가 그런 인물이었다.

팡리즈는 1936년 베이징의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마르크스주의를 열렬히 학습했고 열세살에 공산당 청년 조직에 가입했다. 베이징대학 물리학과 졸업 뒤에는 중국 원자폭탄 프로젝트의 원자로 연구에 배속될 정도로 촉망받는 엘리트였다. 균열은 물리학에서 왔다. 1957년 그는 소련의 양자역학 교과서가 레닌주의에 꿰맞추느라 물리적으로 의심스러운 해석을 채택했다고 짚은 독일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논평을 읽었다. ‘맹신에 기반한 과학’과 ‘회의에 기반한 과학’ 가운데 후자를 택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백화제방의 물결이 반우파 운동으로 뒤집히던 그해, 팡리즈는 과도한 박해를 받는 학생운동가들을 변호하는 편지를 연인 리수셴, 동료 니완쑨과 함께 당 중앙에 보내고자 했다. 편지를 부쳐보기도 전에 사달이 났다. 팡리즈는 우파로 몰려 출당되었고 핵 프로젝트에서도 축출되었다. 문화대혁명기에는 가혹한 광산 노동에 내몰렸다. 그는 수중에 있던 단 한권의 물리 서적, 상대론적 우주론에 관한 책으로 고난을 견뎠다. 그를 사상범으로 만든 것도, 그를 살게 한 것도, 물리학이었다.

광고

마오쩌둥 사후 복권된 팡리즈는 중국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이 되었다. 달변가였던 그는 1980년대 전국 대학 캠퍼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학계 인사였다. 1985년 저장대학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1919년) 5·4 운동의 구호는 과학과 민주로 나라를 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는 과학에서 시작하여 민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가 보기에 과학 정신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이며, 맹목적으로 따라야 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정신이다.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것은 발언자의 지위가 아니라 증거와 검증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마르크스주의의 지도가 필요했던 적이 없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는 이 태도를 물리학 바깥으로 확대 적용했다. 어떤 권위도 검증 없이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면, 정치권력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국가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옳은 것을 국가도 따라야 하는 사회, 그가 보기에 ‘민주’란 그런 사회의 이름이었다. 과학 정신과 민주 정신의 결합은 논리적 필연이었다.

팡리즈는 중국과학기술대학의 교훈으로 과학·민주·독립·창조라는 네가지 지향을 제안했다.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당의 영도, 마르크스주의라는 덩샤오핑의 4항 기본원칙과 사뭇 대치되는 목록이었다. 급조된 구호는 아니었다. 일찍이 1955년, 베이징대학 재학 시절 팡리즈는 교내 공산주의청년단 회의를 중단시키고 대학이 길러야 할 것은 ‘창조적 정신’인가 ‘모범생’인가를 두고 토론을 벌인 전력이 있었다. 30년이 흘러 부총장이 된 그는 젊은 날의 문제의식을 정책과 제도로 옮기고자 했다. 대학 내 정치 지도 인력을 철수시키는 실험을 감행했고, 사상의 자유를 두고는 “과거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도 주창했던 바인데 지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역설했다. 과학자와 지식인이 정책 결정에서 배제되는 현실과 경직된 대학 교육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광고

광고

대가는 혹독했다. 그의 연설에 고무된 학생들이 1986년 말 시위에 나서자 그는 또다시 출당되었다. 곧이어 부총장직에서 해임되어 베이징천문대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덩샤오핑에게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이 나온 게 바로 그 직후였다. 그 편지에 호응해 저명한 과학자 40여명이 민주개혁과 기초과학 지원을 공산당에 요구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과학자들이 집단으로 민감한 정치 사안에 목소리를 낸 최초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중국 5·4 운동 70돌을 기념한 1989년 4월 강연에선 과학이 중국에 뿌리내리는 데 300년이 걸렸으니 70년밖에 안 된 중국 민주주의의 곡절에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소리 높였다. 같은 해 천안문 민주화 시위 진압 국면에서, 정작 그는 학생 집회 중단을 설득했음에도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미국 대사관에 1년여를 피신한 끝에 망명길에 오른 그는 애리조나대학 물리학 교수로 지내다 2012년 세상을 떠났다. 생의 마지막 10분까지 화상통화로 국제학술회의를 준비하던, 끝까지 현역 과학자인 채로.

팡리즈는 ‘과학’과 ‘민주’라는 두 기둥 위에서 과학자가 인류의 지성과 사회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5·4 운동 이래 면면히 이어진 중국 과학 정신의 적통을 잇고 있다.

하지만 베이징은 이를 배제하고 잊기로 한 것 같다. 팡리즈의 회고록과 문집은 대륙 바깥에서만 출간될 수 있고, 공적 추모 역시 대부분 국경 밖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에서 강요된 망각이 영원했던 적이 있던가. 과학굴기 이후 먼 훗날 언젠가 중국이 팡리즈를 다시 품을 수 있는 ‘대국’으로 거듭난다면, 그것은 중국에도, 한국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에도 더 긍정적인 미래일 것이다. 만약 중국 과학기술계가 팡리즈 같은 인물들에 의해 인도된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때의 중국 과학기술계를 지금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광고

팡리즈만큼 투철하게,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과학 정신과 민주 정신을 결합하고 견지하는 과학기술인들의 역할이 지금 한국에서도 절실히 필요하다. 과학과 기술은 개발, 효율, 기술관료주의를 떠받칠 수 있는 만큼이나 민주주의와도 긴밀히 연결될 수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유산을 모두 간직한 우리나라에서라면 더더욱.

이종식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 과학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사학, 과학기술학(STS), 과학기술정책학을 교차시키며 현대 중국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