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야 할것은 정치 과정과 동학
주가가 흔들리고, 바닷길 막혀도
완충장치를 충분히 준비해둬야
일상 지키는 정치만이 마음 얻어
김진호 단국대 교수·동경대학 방문연구원
체감 경제가 바닥이다. 최근 수도권과 지방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한결같이 들은 이야기다.
올해 7월 코스피에서는 서킷브레이커가 잇따라 발동됐다. 외국인 자금이 빠지면 폭락하고 들어오면 폭등하는 장세가 이어지는 동안, 그 충격을 가장 크게 떠안은 것은 개인 투자자였다. 서울 부동산에서는 대출 한도가 시장의 판세를 바꿔놓았다. ‘8·3 세제개편’ 이후 아파트 거래의 79%가 대출 한도가 상대적으로 넉넉한 15억원 이하에 몰렸고, 전·월세 매물이 마르자 무주택 세입자들은 빚을 내 매수로 돌아섰다. 올봄에는 미국-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원·달러 환율이 17년만에 1천50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한국 원유 수입 3분의2 정도가 지나는 바닷길이 막히니 장바구니 물가가 흔들렸고,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2.9%로 여전히 물가안정 목표(2%)를 웃돈다. 주가는 외국 자본이, 집값은 대출 한도가, 물가는 해협 전쟁이 정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삶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맹자는 백성은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고 했는데, 생업과 재산이 안정되지 않으면 백성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곧 공동체를 믿고 지키려는 마음을 잃는다는 것이다. 홉스 역시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호’에서 찾았다. 보호하지 못하는 권력에는 복종해야 할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안보가 접경지에서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일자리와 집, 노후 자산과 복지를 지키는 일도 안보다. 그러나 현실 정치 현상은 다르다. 외교·안보는 진영의 구호가 되었고 경제는 단기 지지율의 지표가 되었다. 케인스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경제를 움직이는 것이 정교한 계산이 아니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라고 보았다. 앞날이 불안하면 기업은 투자를 미루고, 가계는 소비를 줄이며, 젊은 세대는 출산까지 미룬다는 것이다. 정치의 우선 과제는 국가와 경제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의 상당 부분이 나라 밖에서도 온다는 데 있다.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은 국가는 초세계화, 국가 주권, 민주주의 가운데 두 가지만 동시에 온전히 가질 수 있다는 ‘세계화 트릴레마’를 제시했다. 한국도 지금 그 현상이 있다. 미국은 관세 협상에서 약속한 대미 투자 이행과 알래스카 LNG 사업 참여를 요구하며 응하지 않으면 더 큰 부담을 지우겠다고 공언한다. 북한은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 원인을 부인하며 러시아와 군사 협력을 더 넓히고 있다. 게다가 올 11월 중국 선전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시기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될 수 있는데, 한국이 주도하지 못하는 환경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정치철학자 필립 페팃은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로 정의한다. 주인이 아무리 친절해도 노예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남의 자의적 결정에 언제든 휘둘릴 수 있는 상태 자체는 자유가 아니다. 경제도 이와 유사하다. 당장 간섭받지 않더라도 외국 자본의 이탈, 주요 물류통로 봉쇄, 강대국의 결정에 일방적으로 매여 있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안보와 경제에 주권이 거듭 강조되는 이유다.
지금 바뀌어야 할 것은 정치 과정과 동학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은 동기의 순수성을 따지는 신념윤리만으로는 부족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책임윤리를 함께 갖추라고 말했다. 이념의 선명성이 아니라 장바구니 물가와 취업, 노후, 내 집 마련이라는 결과로 평가받는 정치 과정이 중요하다. 정치 동학이 중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대미·대중 정책이 뒤집히는 나라는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에게 전략적 공간을 내준다. 존 롤스의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를 통해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세력도 국민의 생존과 생활을 지킨다는 최소한 국가 전략만큼은 진영을 넘어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삶이 먼저인 정치는 구호가 아니다. 주가가 흔들려도, 바닷길이 막혀도, 강대국이 압박해도 국민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완충장치를 충분히 준비하는 일이다. 안보와 외교, 경제를 따로 떼어 놓지 않고 국민 생활과 연관된 하나의 정책으로 묶을 때 정치는 비로소 신뢰를 되찾을 것이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국민의 생활을 지키는 정치만이 국민의 마음을 얻는다.
/김진호 단국대 교수·동경대학 방문연구원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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