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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산책] 58. 우리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박덕준

곽덕준(1937~2025)은 산청이 본향인 재일 한인 작가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954년 교토시립 히요시가오카 고등학교 미술공예 과정 일본화과에 입학해 1957년 졸업했다. 일본화를 전공했지만 졸업 후에는 생계를 위해 기모노 염색 일에 종사했다.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산책] 58. 우리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박덕준

곽덕준 작 ‘무의미 991’(1999). /경남도립미술관

곽덕준(1937~2025)은 산청이 본향인 재일 한인 작가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954년 교토시립 히요시가오카 고등학교 미술공예 과정 일본화과에 입학해 1957년 졸업했다. 일본화를 전공했지만 졸업 후에는 생계를 위해 기모노 염색 일에 종사했다. 1959년 폐결핵으로 투병한 뒤 본격적으로 미술가 길에 들어섰다. 1964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교토현대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하면서 미술계에 진입할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재일 한인으로서의 이중적 정체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에게 재일 한인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은 개인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개인과 사회, 권력과 인간, 현실과 인식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문제의식은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하고, 무겁고 진지한 문제를 역설과 유머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체화며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이러한 작업 태도와 철학은 한국 실험미술의 전개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한국적 개념 미술 한 경향으로도 자리매김하게 됐다.

염색 기술을 활용한 회화로 미술계에 등장한 그가 판화, 사진, 영상, 입체, 이벤트 등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는 동시기 개최된 ‘교토야외조각전’에서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계량기’, ‘계량기와 돌’, ‘자석과 돌’, ‘4개의 시계’ 등 작품으로 남았다.

한국에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10개의 계량기’(1988)는 저울 10개를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려 ‘계량하는 것이 오히려 계량되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한 작품으로 익숙한 사물의 기능과 의미를 뒤집음으로써 인간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의 틀에 의문을 제기했다.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으로 다시 제작되면서 그의 대표적인 개념미술 작품으로 알려지게 됐다.

1974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대통령과 곽’ 연작에서는 미국 대통령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사진 작업으로 거대 권력과 개인의 의미를 질문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금이 간 유리판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얼굴을 유리판에 완전히 밀착시킨 채 이리저리 문지르며 무참하게 일그러뜨리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촬영한 작품 ‘자화상 78’(1978)에서 시대와 대치하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며, 한 개인의 얼굴을 우리 시대의 자화상으로 환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곽덕준이 지속적으로 탐구한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사유는 경남도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의미 991’(1999)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곽덕준의 ‘무의미’ 연작 중 하나로 1999년에 제작됐다.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수많은 인물 형상이 작품 안에 묘사되어 있으며 그 인물들은 격자 구조 속에 수직·수평으로 정리되어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격자 구조는 개별적인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하나의 규칙적인 질서를 이룬다. 격자 안에서 일정한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인물 행위에는 뚜렷한 목적이나 사건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을 통해 방향성과 규칙성 자체가 강조되며, 개별 인물의 행위는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익명화된다. 이러한 구성은 정해진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의 모습을 환기하며, 반복되는 일상과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긴장과 무력감을 드러낸다.

곽덕준의 ‘무의미 991’에서 ‘무의미’는 단순히 삶의 허무나 의미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질서와 가치 그리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행위를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사유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분할된 화면과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이미지는 개별적인 감정이나 경험의 차원을 넘어,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그 불확실성을 질문한다. 이러한 반복과 분절의 형식은 일상적 행위에 내재한 규범과 질서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이미영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전수강 <1970년대 곽덕준의 ‘개념적 미술’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2025. 서울

이미영 ‘경남신문·경남도립미술관 공동기획- 한국미술을 빛낸 경남의 거장들Ⅱ’(2) 곽덕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경계인, 고독한 삶을 그리다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 AG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1998

우정아 <한국 현대미술에 나타난 개념미술의 담론적 형성과 실천의 양상: S.T 조형미술학회를 중심으로>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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