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수에즈 운하가 열리자 세계무역의 지도가 바뀌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하던 배들은 더 이상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항로가 짧아지자 물류비용이 낮아졌고, 무역의 중심축도 달라졌다. 새로운 길이 열리면 돈이 움직이고, 돈이 움직이면 권력도 이동한다.
금융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시장금리가 치솟았지만 은행 예금금리는 규제에 묶여 있었다. 그 틈을 ‘머니마켓펀드’(MMF)가 파고들었다. 미국 자산운용협회(ICI)에 따르면 MMF 순자산은 1975년 37억달러에서 1982년 2198억달러로 7년 만에 무려 59배나 불어났다. 은행에 잠자던 돈이 높은 수익을 찾아 움직이는 거대한 예금 이탈이 본격화된 것이다. 결국 미국은 예금금리 규제를 단계적으로 철폐해야 했다. 돈의 이동이 금융의 질서를 바꾼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인공지능(AI)이 또 하나의 금융 항로를 열고 있다. 이번에는 새로운 금융상품이 아니라 돈이 움직이는 방식 자체의 혁명이다. AI가 수익률과 수수료, 위험을 비교하고 자금 이동까지 도와준다면 금융회사에 묶여 있던 돈은 더 이상 잠자고 있지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긴장해야 할 곳은 은행이다. 로이터통신은 미국 은행들이 AI로 촉발된 예금 이동에 대응해 3조8000억달러의 저축예금에 연 4% 금리를 지급한다면 추가 이자 비용이 연간 79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요구불예금의 유휴자금까지 같은 금리를 요구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최대 78개 은행이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에 따른 추정치지만 충격의 크기는 가볍지 않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7월 말 국내 은행의 요구불예금과 저축예금은 약 681조원에 달했다. 은행은 그동안 결제망과 주거래 관계, 고객의 무관심에 기대어 저원가성 예금을 확보해왔다. 일종의 ‘게으름세(Laziness Tax)’를 누려온 셈이다. 이제 AI가 그 세금을 없애려 한다. 저원가성 예금이 흔들리면 은행의 핵심 수익원인 예대마진도 압박받는다. 불완전판매 규제와 신탁 수수료 관행에 대한 감독 강화까지 겹치면서 비이자이익도 안심하기 어렵다.
더 거대한 변화는 700조원 규모의 연금시장에서 이미 시작됐다. 2025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원을 넘어섰고, 증권사의 적립금은 한 해 동안 21% 증가해 은행과 보험의 증가율을 앞질렀다. 개인연금에서도 증권사 등이 판매하는 연금저축펀드는 61조원으로 급증한 반면 보험사의 연금저축보험과 은행의 연금저축신탁은 감소했다. 수익률과 비용에 따른 경쟁이 업권의 경계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AI는 이 흐름에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다. 개인별 연금의 장기 수익률과 위험, 수수료를 비교해 더 적합한 상품과 금융회사를 찾아주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수익률만 좇는 이동은 위험하다. 그러나 고객의 정보 부족과 거래의 번거로움에 기대어 돈을 붙잡아두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금융회사들의 생존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은행은 예금을 붙잡는 데 급급하기보다 결제·대출·연금을 아우르는 종합 금융생활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보험사는 저축성 상품의 수익률 경쟁보다 종신연금과 장수위험 보장이라는 본연의 강점을 살려야 한다. 증권사는 유입되는 투자자산을 AI로 맞춤 관리하고, 고객이 오래 자산을 불릴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자산운용사는 브랜드나 판매채널에만 기대기보다는 장기 운용성과와 위험관리 능력, 상품 경쟁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당장은 은행과 보험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증권사나 자산운용사가 최종 승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AI는 이들의 수수료와 운용성과까지 냉정하게 비교할 것이다. 어쩌면 고객의 금융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AI 플랫폼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수에즈 운하가 열렸다고 바닷물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바닷길이었고, 그 길이 세계 경제의 지도를 바꿨다. AI 시대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돈의 양이 아니라 돈이 움직이는 길과 속도다. 게으른 돈이 깨어나는 순간, 금융회사들의 진짜 경쟁이 시작된다.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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