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살아갈 미래를 헤아려보면
기후재난 빈번 뉴스볼때 두려워
탄소 안쓰는 네팔 온난화 대가를
많은 희생, 무관한지 되돌아볼일
김성중 소설가
딸이 태어나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나는 내 생몰연대를 넘어, 딸의 생몰연대에 해당하는 시간까지 나와 상관있는 것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딸이 살아갈 미래를 헤아려보면 기후재난이 빈번해지는 뉴스를 볼 때마다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으려면 단어나 용어를 정확히 써야 한다. ‘네팔 홍수’가 ‘네팔 산사태’로 정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학자는 ‘기후 변화’라는 말은 ‘지구 온난화’를 희석시키는 용어라고 비판한다. 지구의 역사에서 기후가 변하는 이벤트는 늘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탄소 문명을 만들어 소비한 인간으로 인한 것이고, 그 결과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런 예고는 수십년 전부터 나왔는데, 지금까지도 획기적인 전환 없이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다 재난이 가시화되는 뉴스를 연속적으로 맞고 있으니 한탄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원뜻과 달리 어리석게만 보이니 말이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과정에도 핵심적인 요소는 기후변화였다. 사피엔스 종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다부진 네안데르탈인은 추위에 강한 체형이었지만 극단적인 기후 널뛰기 과정에서 사멸했다. 그 중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자기장이 약해지면서 오존층이 파괴된 ‘라샹 이벤트’와 대형 빙하가 붕괴하여 북대서양으로 쏟아지면서 극심한 혹한과 가뭄이 발생한 ‘하인리히 이벤트’다. 오랜 빙하기를 견뎌냈던 강인한 네안데르탈인도 숲이 사라지고, 그로 인해 그들의 주식이었던 매머드 같은 대형초식동물이 사라져가는 상황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자외선과 추위에 동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사냥을 나가는 대신 벽화 그림을 그리는 그들의 마지막을 상상해보라. 우리는 얼마나 다른 장면을 만들 수 있을까?
영화에서 원시인들은 단체로 공룡이나 매머드 사냥을 하지만 그건 네안데르탈인의 모습이다. 우리 종은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이나 바다 생선, 그리고 수렵 채집 생활에 비중을 두었다. 숲에 매복해 있다가 무거운 창을 들고 강하게 찌르는 네안데르탈인은 소설의 주인공 같은 멋진 모습이지만, 돌을 갈고 덫을 만들고 뼈바늘로 방한복을 해 입으며 무리지어 사는 사피엔스종은 무수한 조연들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더 적은 노력을 쓰고도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던 그 무리는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영아사망률을 줄이는 데 썼다. 그들은 생존에 성공했다. 성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번영하고, 낭비하고, 지금도 낭비하고 있다. 그 당시의 생존방식, ‘적은 에너지를 쓰고도 살아남기’ ‘남은 시간을 미래 세대에 사용하기’야 말로 지금에 꼭 필요한 지혜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왜 다시 매머드와 같이 거대한 ‘성장 동력’을 찾고 있는 것일까? 인공지능 개발이 과연 매머드가 될지도 막연하지만, 다음번 성장을 견인해줄 무언가가 없으면 자본주의의 위기가 오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젊은이가 되기에도 아직 한참 더 자라야 하는 어린 딸을 보고 있으면 ‘이건 참 공정하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든다. 산업혁명부터 지금까지 벌어졌던 개발의 청구서는 미래세대들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네팔처럼 탄소를 쓰지 않는 나라가 미국, 중국, 유럽 같이 탄소배출량이 높은 나라가 만들어낸 온난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도 세계 10위 정도로 탄소를 배출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전학자인 고미숙 선생님의 강연 영상을 보다가 무릎을 친 순간이 있다. “사람이 아프고 나았으면 배우는 게 있어야지!”라는 말씀이었다. 재난이 오고, 그것을 수습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 이 시간에도 사망자의 숫자가 불어나고 있는 네팔 산사태는 앞으로도 계속될 위기의 일부 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많은 희생이 나와 무관한 일인지 되돌아볼 일이다.
/김성중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