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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R편집국에서] 하정우의 자리, 허사비스의 자리

기원전 3세기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의 순도를 가리기 위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유레카와 함께 성공했다. 그렇게 진위(眞僞)를 가르는 일은 그의 평생 과업이자 숙명이었으며, 로마군이 성벽을 넘어오는 순간까지도 모래 위에 도형을 그렸다.

[ER편집국에서] 하정우의 자리, 허사비스의 자리

기원전 3세기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의 순도를 가리기 위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유레카와 함께 성공했다. 그렇게 진위(眞僞)를 가르는 일은 그의 평생 과업이자 숙명이었으며, 로마군이 성벽을 넘어오는 순간까지도 모래 위에 도형을 그렸다.

과학을 남기고 진실을 남겼다. 또 일화를 남겼다. 자리를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2026년 4월 28일 한국 AI 정책의 사령탑이 자리를 떠났다.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신설된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직에 임명됐던 하정우 수석이 6·3 보궐선거 출마를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고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 임명된 지 채 11개월이 되지 않은 시점이다. 부산 북구갑 출마가 유력하다.

하 수석은 한국 AI 업계가 보유한 몇 안 되는 자산이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마치고 삼성SDS를 거쳐 네이버에서 클로바 AI 리서치 리더, AI랩 연구소장, 퓨처AI센터장을 지냈다. 누적 피인용수 1만7000회, NeurIPS SAC를 두 해 연속 맡고 있는 연구자다. 전 정부 시절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AI·데이터 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정파를 가리지 않고 그를 필요로 했다는 의미다.

하 수석의 정책 비전은 매력적이다. 일관되게 '소버린 AI'를 주창해왔다. 2024년 인터뷰에서 그는 "GPU 1만장을 정부가 사서 국가대표 AI기업 3~4곳에 5천장을 몰아주고, 이들이 만든 모델을 오픈소스로 풀어 스타트업이 중동·동남아용 LLM으로 가공해 수출하자"는 구체적 그림을 제시한 바 있다. 캐나다,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사례를 들며 정부의 직접 지원이 글로벌 빅테크 시대에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 설득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비전은 청와대 입성 후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로 구체화됐다. SK텔레콤, LG AI연구원, 네이버클라우드, 업스테이지, NC AI 등이 컨소시엄으로 참여해 한국형 모델을 빌드하기 시작했다.

일부 모델은 오픈웨이트 평가에서 의미 있는 점수를 받았다. 적어도 한국 기업들이 대규모 모델 훈련을 직접 경험하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전이다.

다만 갈 길은 멀다.

2026년 스탠퍼드 AI 인덱스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 최상위 모델의 성능 격차는 2.7%포인트까지 좁혀졌다. 한국은 '주목할 만한 AI 모델' 보유 수에서 세계 3위에 올랐지만 미국 50개·중국 30개와의 절대 격차는 여전히 크다는 평가다.

실제 산업 적용 단계에서는 구글 젬마(Gemma) 같은 소형 모델조차 따라잡기 버겁다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온다. 국내 기업 다수가 비용 효율을 이유로 검증된 해외 모델, 특히 중국발 오픈모델을 개량해 쓰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들려온 소식이 하 수석의 사퇴는 매콤한 뒷맛을 남긴다. 더불어민주당이 'AI에 가장 적합한 인재'로 그를 영입했고 정청래 대표가 직접 설득에 나섰다지만 씁쓸하기 이를데 없다. 무엇보다 AI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GPU도 데이터도 아닌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특히 안타깝다. 국가의 AI 백년대계를 설계해야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11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선선한 충격일 뿐이다.

비록 사퇴 회견에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AI 3강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을 그 시점에서 하고 있을 것"이라고 밝혔으나, 그 장면 하나하나에 "과연 이 정부가 AI 3G에 대한 진정성이 있기는 했던가"라는 괴로움의 감정만 편린처럼 흘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심지어 후속 인사 공백 우려도 크다. 하 수석이 들고 가던 어젠다의 무게에 비해 그것을 이어받을 인물의 윤곽은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 AI안전연구소, 국가AI위원회, K-AI 파트너십 등 그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던 트랙은 여러 개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하 수석 개인의 선택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그는 정치 입문이라는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고 그 결정이 의회에서의 AI 입법으로 이어진다면 또 다른 형태의 기여가 될 수도 있다. 보궐선거 자체에 대한 평가는 유권자의 몫이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한국에서는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가 정치·행정의 무대로 옮겨가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후속 인력 풀이 너무 얇다. 핵융합, 우주, 바이오 등 여러 분야에서 반복돼온 패턴이다. 한 명의 스타 연구자에게 어젠다 전체가 의탁되고, 그가 자리를 옮기면 어젠다도 함께 흔들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물이 정책을 떠받치는 구조이지 정책이 인물을 떠받치는 구조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허탈하고, 걱정이 된다.

하정우 전 수석이 이재명 대통령과 허사비스 딥마인드 CEO 접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정우 수서의 마지막 공식업무는 청와대에서 열린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와 이재명 대통령의 접견 배석이라고 한다.

허사비스는 1976년생, 하 수석과 한 살 차이다. 어린 시절 체스 신동으로 출발해 인지신경과학을 공부한 뒤 2010년 딥마인드를 공동창업했다. 이후로는 외길인생이다. 알파고로 바둑을 정복하고 알파폴드로 단백질 구조 예측이라는 50년 난제를 풀어 202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창업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딥마인드의 CEO다. AGI(범용인공지능)라는 장기 목표를 향해 연구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허사비스가 16년간 한 자리를 지키며 알파고에서 알파폴드로, 다시 AGI로 단계적 돌파를 만들어낸 것은 연속성의 산물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때로는 같은 정권 내에서도 사령탑이 교체된다. 정상일까? 4월 한 달에만 글로벌 최고 수준의 모델이 14종이 쏟아진 전장에서 이제 한국 AI 콘트롤 타워는 지방선거에 밀려 완벽히 실종됐다. 씁쓸하다. 무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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