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 박상진 회장. 사진=한국산업은행 제공
[서울와이어=김민수 기자] 중동 전쟁 장기화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산업계 전반에 부담이 커지고 있다. 원가 상승과 수요 둔화, 글로벌 공급망 불안이 겹치며 석유화학과 철강 등 주력 산업은 물론 수출 전반에 압박이 확대되는 모습이다. 이 같은 국면에서 산업을 떠받치는 정책금융기관 한국산업은행의 역할도 한층 중요해졌다. 그 중심에 박상진 산업은행 회장이 서 있다.
◆‘첫 내부출신’ 수장…산업 재편·생산적 금융 구상 본격화
박 회장은 1954년 산업은행 설립 이후 71년 만에 처음 배출된 내부 출신 수장이다. 1990년 입행해 기아그룹·대우중공업·대우자동차 태스크포스, 법무실장, 준법감시인 등을 거치며 구조조정과 금융 실무를 두루 경험했다. 산업은행의 의사결정 구조와 한국 산업의 부침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 처음으로 수장에 오른 셈이다. 상징성과 기대가 큰 만큼 산업 지원과 체질 개선, 미래 성장산업 육성이라는 복합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부담도 함께 안고 있다.
그가 지난해 9월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해온 방향은 명확하다. 생산적 금융과 산업 재편이다. 단순한 자금 공급을 넘어 산업 체질을 바꾸고 미래 성장동력을 키우는 역할로 산업은행의 기능을 재정의하겠다는 구상이다. 첨단전략산업 지원, 중소·벤처기업 육성, 지방 산업 경쟁력 강화, 전통 산업 사업재편이 핵심 축으로 제시됐다.
박 회장은 연초 시무식에서도 “산업은행은 본연의 역할인 산업과 기업 육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성장펀드 연계 지원, 지역경제 활성화, 주력 산업 사업재편을 주요 과제로 다시 제시하며 정책금융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수익성과 자산·부채 구조 개선 필요성도 함께 언급했다.
이 같은 구상은 최근 석유화학 산업 사업재편 프로젝트인 ‘대산 1호’ 금융지원 방안으로 구체화됐다. 산업은행은 지난 20일 채권금융기관 자율협의회를 통해 HD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통합 프로젝트 지원안을 확정했다. 차입금 이관과 상환 유예, 신규 자금 공급을 중심으로 한 이번 패키지는 석유화학 산업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회복을 겨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롯데케미칼 차입금 1조6000억원을 HD현대케미칼로 이관하고 약 7조9000억원 규모 협약채무에 대해 3년 상환 유예를 적용한다. 설비 통합과 친환경 전환을 위한 신규 자금도 최대 1조원 공급되며 이 중 4300억원은 산업은행이 전담한다. 통합 이전 단계의 유동성 대응을 위한 5000억원 규모 브릿지 자금도 단독 지원한다. 이와 함께 최대 1조원 규모의 영구채 전환 방안도 포함됐다.
박 회장은 이를 두고 국가 기반 산업인 석유화학 산업의 재편 기반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여수, 울산 등 후속 프로젝트 추진 필요성도 직접 언급하며 사업재편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실제로 여천NCC 역시 사업재편 절차에 착수하며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가 석유화학 산업 재편에 집중하는 배경에는 현장 경험도 자리한다. 박 회장은 “신입 행원 시절 여수화학단지 금융지원 업무로 산업은행 생활을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산업 성장기와 구조조정 국면을 모두 거친 경험이 현재의 판단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동 리스크로 원유와 납사 수급 불안이 커지면서 석유화학 업황은 공급과잉, 수익성 악화, 중국 증설 부담 위에 추가 압박을 받고 있다. 산업은행이 단순 채권 관리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체질 개선과 경쟁력 회복까지 함께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산업은행은 석유화학산업 사업재편 1호 프로젝트인 HD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 대산공장의 통합 계획을 논의하기 위하여 지난달 25일 '구조혁신 지원 협약'에 따른 채권금융기관 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서울와이어DB
◆석유화학 재편 넘어 미래산업 육성으로…박상진호 투트랙 전략
하지만 박 회장의 구상은 석유화학 등 전통 산업 사업재편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위기 산업 재편과 함께 미래 산업 투자 확대를 또 다른 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로봇 등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150조원 규모 정책 펀드로 산업은행이 전담 조직을 통해 운영을 주도하고 있다. 올해 초에는 3조4000억원 규모 신안우이 해상풍력 사업이 1호 프로젝트로 승인됐으며 후속 사업도 이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산업은행은 향후 5년간 총 250조원을 공급하는 ‘KDB 넥스트 코리아’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첨단 산업 경쟁력 강화, 지역금융 확대, 주력 산업 지원, 국민성장펀드 연계 투자 등을 하나의 틀로 묶어 산업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전략이다.
투자 기능 강화 역시 중요한 과제다. 산업은행은 기존 벤처 투자에 더해 성장 단계별 후속 투자 확대를 통해 기업 스케일업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단순한 자금 공급을 넘어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장기투자로 이어진다.
정책금융기관 수장으로서 박 회장의 역할은 국내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통상 정책 변화 대응, 지역균형 발전을 위한 투자 확대, 에너지 전환 지원 등 복합적인 과제를 동시에 조율해야 한다. 산업과 금융의 접점에서 사실상 경제정책 집행자의 역할까지 요구받고 있다.
내부 출신이라는 강점은 조직 이해도와 실행력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정부와 시장, 산업계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능력은 앞으로 검증이 필요한 영역이다. 조직 내부에서도 정책금융 기능 강화와 위상 회복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성과에 대한 요구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취임 반년 만에 박 회장이 내놓은 방향성은 분명하다. 석유화학 사업재편, 국민성장펀드, 산업 전환, 모험자본 공급 등 굵직한 과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산업은행의 역할을 다시 짜고 있다. 국제유가 급등과 지정학 리스크가 확대되는 현 시점에서 시장의 판단 기준은 결국 이 같은 구상이 실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유가 충격과 산업 재편 압력이 동시에 커지는 지금 박상진 리더십은 본격적인 검증 국면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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