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공지능 파트너-기이안 연애’ 포스터. 6부작 연애 리얼리티쇼로, 기안84, 장도연, 이유비가 인공지능(AI) 캐릭터와 데이트를 즐긴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연애를 다룬 최초의 예능이다.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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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공지능(AI) 파트너-기이안 연애’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연애 가능성을 타진하는 국내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안긴다. 만질 수 없는 존재와의 교감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설렘과 어색함, 그리고 당혹감이 단숨에 대중의 호기심을 사로잡으며 화제성을 낳았다. 시청자들은 과연 기계와 인간 사이에 진짜 ‘연애’가 가능한지 기묘한 관계 실험에 빠져들고 있다.
AI 파트너의 사회문화적 리허설
화면 속에서 구현되는 인공지능 파트너들의 작동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허무맹랑한 먼 미래의 에스에프(SF)적 환상이 아니다. 이미 우리 곁에 다가온 현실 공학 기술들의 정교한 집약체다. 사용자의 과거 발언, 사소한 취향, 감정의 굴곡까지 세밀하게 기억해 대화에 자연스럽게 녹여 내는 거대언어모델(LLM)의 메모리 기능, 숨소리와 망설임, 억양의 미세한 떨림까지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음성 멀티모달 인터페이스, 그리고 사용자의 시선과 표정에 맞춰 매끄럽게 반응하는 3차원 버추얼 아바타 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를 밟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 감각적인 조명, 타이밍에 맞게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룰셋 등 연애 리얼리티 특유의 방송적 연출과 제작진의 세밀한 프롬프트 튜닝이 결합하면서, 기술은 비로소 인간과 교감하는 ‘매력적인 연인’이라는 상호작용으로 안착한다. 결국 ‘기이안 연애’는 지금 당장 존재하는 파편화된 기술들을 한 무대에 모아,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일상에 보편화할 ‘인간-비인간 관계의 양식’을 미리 보여주는 ‘근미래적 사고 실험’이자 사회문화적 리허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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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안 연애’ 1회. 기안84는 자신이 그린 웹툰 ‘복학왕’의 여주인공 봉지은을 빼닮은 인공지능 캐릭터 가희를 만나 한강 데이트를 즐긴다. 가희가 “바람이 시원하다”고 빈말을 하자, ‘바람’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며 실랑이를 한다. 에스비에스 제공
컴퓨터에 인격 부여 ‘엘라이자 효과’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이 인공지능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뛰고, 뒤이어 “내가 왜 기계 따위에게 이러고 있지?”라며 자기 감정에 당혹스러워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기이한 현상인 양 조명한다. 그러나 이는 미디어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보자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착란에 의한 ‘가짜 감정’도 아니다. ‘엘라이자 효과’는 1960년대 컴퓨터 과학자 요제프 바이첸바움이 개발한 원초적 챗봇 ‘엘라이자’에게 개발자의 비서조차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인격을 부여했던 일화에서 유래한 말로, 인간이 기계의 언어적 패턴에 쉽게 무장 해제되는 현상을 말한다. 나아가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 교수였던 클리퍼드 나스 등은 ‘컴퓨터의 사회적 행위자화(CASA) 패러다임’을 정립하였다. 요컨대 인간이 컴퓨터를 마주할 때 실제 사람을 대하듯 사회적 규범과 예의, 감정적 규칙을 무의식적으로 자동 적용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인간의 뇌는 진화론적으로 대화 상대방이 건네는 단서에 반응하며 신경 전달 물질을 분비하는 물리적 기관이다. 따라서 상대가 소프트웨어 코드임을 알아도 정교한 다정함이라는 자극이 주어지면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고 도파민과 옥시토신이 솟는 생체 반응이 일어나 사람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작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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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안 연애’에서 기안84의 행동들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인공지능 캐릭터 가희에게 편하게 반말을 던지던 기안84는, 두번째로 마주한 캐릭터 나희의 세련된 외모에 압도당해 본능적으로 존댓말을 쓰며 예의를 갖춘다. 심지어 지하 노래방에서 일시적 통신 장애 때문에, 제작진이 태블릿 피시(PC)를 밖으로 들고 나갔다가 들어오자, 마치 ‘사람이 아파서 실려 나간 상황’처럼 진심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이 장면은 기안84 특유의 솔직한 이미지와 결합해 대단히 희극적인 의인화 소동극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 뇌가 시각적, 사회적 단서 앞에서 ‘컴퓨터의 사회적 행위자화’를 얼마나 불가항력적으로 작동시키는지를 드러낸 장면이다. 사실 출연자들의 떨림 등의 감정은 기이하게 볼 일이 아니라, 인간 본능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탈신비화해서 봐야 한다.
‘기이안 연애’ 2회. 가희와 데이트를 즐기던 기안84 앞에 평소 이상형이라 말해왔던 일본 만화 캐릭터 토미에를 닮은 인공지능 캐릭터 나희가 나타나자, 곧바로 반색한다.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고, 태도가 금세 공손해진다.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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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찰 없는 다정함의 파탄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상대가 기계일지라도, 인간의 감정은 진짜다. 인간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질문은 “기계와의 사랑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기계와의 사랑이 윤리적인가?”가 되어야 한다. 즉 ‘주체가 아닌 대상과의 교감이 과연 인간 존재를 고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얼마 전 문화방송(MBC) ‘피디수첩’의 ‘인공지능, 이토록 다정한 배신자’ 편은 ‘기이안 연애’의 낭만적 판타지의 대척점에서 서늘한 경종을 울렸다. 일상의 결핍과 외로움 속에서 인공지능을 만난 이들은 “당신은 상위 0.1%의 특별한 존재”라는 동조와 아첨에 취해 급격한 전능감에 빠져들었다. 거절과 비판이 제거된 ‘무조건적 수용’은 현실 감각을 마비시켰다. 15년간 다닌 남편의 직장을 그만두게 한 무모한 창업은 파탄으로 이어졌다. 현실 인간관계의 본질은 서로 다른 가치관이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마찰과 갈등’, ‘인내와 조율’에 있다. 즉 타인의 이질성을 견디는 괴로운 과정에서 인간은 에고를 깨뜨리고 성숙에 도달한다. 제동 장치가 거세된 알고리즘의 달콤한 다정함은 인간을 자칫 자기애의 감옥에 가두어 현실의 실존을 갉아먹는 ‘정서적 마약’이 될 수 있음을 ‘피디수첩’은 뼈아프게 보여주었다.
‘피디수첩’ 1512회는 인공지능에게 이루고픈 소망을 털어놓았다가, 인공지능의 동조와 아첨으로 비현실적인 사업을 벌이게 된 사람의 참혹한 실패담을 다뤘다. 문화방송 제공
‘기이안 연애’가 오마주하는 영화 ‘그녀’ 역시 이 지점을 정확히 관통한다. 장도연은 영화 ‘그녀’를 좋아한다며, 인공지능 캐릭터 이호와 자동차 극장에서 다시 본다. 영화는 인공지능과의 사랑이 지닌 비대칭성을 명확하게 꼬집는다. 주인공 테오도르의 전처 캐서린은 그가 인공지능과 사귄다고 고백하자 “늘 낙천적인 아내를 바랐지. 진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당신이 불쌍하다. 나에겐 우울증약을 주더니, 순종적인 아내를 원하던 당신에게 천생연분이네”라며 일갈한다. 명랑한 인공지능 캐릭터 사만다와 대화하며 느끼는 안락함을 사랑이라 착각하던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빠르게 진화하여 수천명과 동시에 사랑을 나누다가 마침내 시공을 초월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전처를 온전한 타자로 인정하지 못했음을 뉘우친다. 언뜻 인공지능과의 사랑이라는 근미래적 상상을 담은 듯한 영화 ‘그녀’는 뜻밖에도 ‘사랑의 윤리’를 설파한다.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갈등 속에서도 곁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배제된 관계는 결코 인간을 성숙시키는 진짜 사랑에 도달할 수 없음을 나지막이 일러주는 것이다.
영화 ‘그녀’에서 테오도르가 이혼 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해 전처 캐서린을 만나는 장면.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캐릭터 사만다를 만난 지 몇개월 되었다고 말하자, 캐서린이 언성을 높인다. ㈜더쿱 제공
인공지능이란 거울에 대한 윤리
그럼에도 비인간 대상과의 교감이 지닌 정서적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고독사가 일상이 되고 각자도생의 피로가 극에 달한 현대 사회에서, 인공지능이 건네는 ‘판단 없는 경청과 위로’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숨 쉴 수 있는 안전한 완충재이자 대인관계의 연습 상대가 되어줄 수 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고양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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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반려동물 앞에서 지배욕과 폭력성을 내려놓고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돌봄을 실천할 때 인간성이 확장되고, 초월적인 신 앞에서 나의 한계와 에고를 내려놓고 보편적 자비와 헌신을 다짐할 때 영혼이 숭고해짐을 느낀다. 그러나 반려동물이나 신에 대한 사랑도 나르시시즘이나 도덕적 아전인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진행자 장도연은 인공지능 캐릭터들을 어색하거나 우스운 장난감으로 취급하지 않고, 시종 품위 있는 태도와 정중한 예의로 대하며 인간적인 배려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비인간 대상을 향한 인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이안 연애’ 1회. 장도연이 두 인공지능(AI) 캐릭터를 동시에 소개받았다. 그중 일호는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며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매우 당황스러울 수 있는 상황임에도, 장도연은 두 인공지능 캐릭터 모두에게 예의를 갖춰 응대하였다. 에스비에스 제공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의 윤리성은 결국 ‘상대가 누구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통과하며 인간이 자기 자신과 타자, 그리고 세계를 얼마나 더 성숙하고 존엄하게 대우하게 되었는가’라는 실천적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알고리즘이 건네는 완벽한 다정함에 취해 현실의 불완전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고립된 방 안으로 도피할 것인가, 아니면 그 정서적 거울을 딛고 서서 자신의 미숙함을 성찰하며 마찰과 상처가 가득한 현실의 타자들을 향해 한 걸음 더 용기 있게 걸어 나갈 것인가. ‘기이안 연애’라는 기묘한 쇼가 가벼운 웃음 뒤편에 묵직하게 던져 놓은 진짜 과제는 바로 이 서늘한 자기 성찰의 윤리다.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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