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월드=김승기 기자] 생성형 인공지능(AI) 산업의 경쟁 방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누가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들었는지가 핵심이었다면 최근에는 그 모델을 실제 서비스로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그래픽처리장치(GPU)·전력·데이터센터 확보 능력이 더 중요한 경쟁 요소로 떠오르는 흐름이다.
앤트로픽이 최근 스페이스X와 손잡은 배경도 여기에 있다. AI 모델 경쟁이 결국 ‘컴퓨팅 자원 확보전’으로 확장되면서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 계열 인프라까지 활용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앤트로픽은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개발자 행사 ‘코드 위드 클로드 SF 2026’에서 스페이스X 컴퓨팅 인프라 활용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같은 날 스페이스X AI 조직 역시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앤트로픽에 콜로서스 1 접근 권한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코드 위드 클로드 SF 2026에 참석한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 [사진=앤트로픽]
스페이스X 설명에 따르면 콜로서스 1은 22만 개 이상의 엔비디아 GPU를 기반으로 구축된 초대형 AI 슈퍼컴퓨팅 시설이다. H100·H200·GB200 계열 GPU가 포함됐으며 AI 학습과 추론, 대규모 생성형 AI 운영을 위한 인프라로 활용되고 있다.
이번 계약 이후 앤트로픽은 클로드 코드 사용 한도를 확대했다. 프로, 맥스, 팀, 엔터프라이즈 플랜 사용량은 기존 대비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났으며 일부 피크 시간대 제한 정책도 폐지됐다. 미국 IT 전문매체 아스테크니카는 이번 조치가 스페이스X 인프라 계약과 직접 연결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표면적으로는 서비스 품질 개선 조치처럼 보이지만 이번 사례는 AI 산업 구조 변화의 상징적 장면으로도 해석된다.
AI 산업, 이제는 ‘좋은 모델’만으로 경쟁하기 어려운 시대
최근 생성형 AI 기업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컴퓨팅 자원 부족이다.
콜로서스 데이터 센터. [사진=스페이스X AI]
AI 모델이 커질수록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GPU 수량도 급격히 증가한다. 여기에 이용자 수가 늘어나면 서비스 운영에 필요한 연산 비용 역시 폭증한다. 결국 모델 성능만 높다고 시장 경쟁력이 유지되는 구조가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주요 테크 기업들은 최근 수년간 GPU 확보와 데이터센터 계약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기반 초대형 인프라를 활용하고 있으며 메타는 자체 AI 데이터센터(AIDC) 확대와 GPU 확보에 수백억 달러 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구글 역시 TPU 기반 AI 인프라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앤트로픽도 AWS,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등과 장기 컴퓨팅 협력을 확대해왔다. 최근에는 특정 클라우드 사업자 의존도를 줄이고 다양한 공급망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뚜렷해지는 분위기다.
디 인포메이션은 최근 테크 기업들이 사실상 ‘GPU와 전력을 사들이는 기업’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와이어드 역시 디 인포메이션 보도를 인용해 앤트로픽의 대규모 TPU·클라우드 계약 확대가 AI 컴퓨트 확보 경쟁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경쟁사 인프라까지 활용…머스크도 직접 협력 배경 설명
이번 계약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스페이스X 인프라가 일론 머스크의 AI 사업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콜로서스 1은 원래 생성형 AI ‘그록(Grok)’ 학습을 위해 구축된 시설로 알려져 있다. 다만 머스크는 최근 X를 통해 “스페이스X AI는 이미 학습 작업을 콜로서스 2로 이전한 상태였다”며 “그 이후 콜로서스 1을 앤트로픽에 임대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앤트로픽 경영진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인류에 도움이 되는 AI를 만들려는 접근 방식에 인상받았다”고 언급했다.
과거 머스크가 앤트로픽과 오픈AI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생성형 AI 시장에서는 이제 경쟁사 여부보다 연산 자원을 얼마나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느냐가 더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특히 최근에는 AI 데이터센터 구축 자체가 하나의 산업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신 AI 데이터센터는 단순 서버 시설이 아니다. 수십만 개 GPU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초대형 전력망과 냉각 시스템, 고속 네트워크가 함께 필요하다.
이 때문에 AI 경쟁은 점차 반도체·클라우드 경쟁을 넘어 전력과 에너지 산업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양상이다.
‘미토스 충격’ 확산…AI 보안 경쟁도 본격화
한편 앤트로픽은 최근 공개한 차세대 보안 AI 모델 ‘클로드 미토스(Claude Mythos)’를 통해 또 다른 산업 변화를 만들고 있다.
앤트로픽은 지난달 ‘프로젝트 글래스윙(Project Glasswing)’을 공식 발표하며 미토스를 기반으로 주요 소프트웨어 취약점을 탐지·방어하는 글로벌 보안 협력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또 앤트로픽은 미토스가 주요 운영체제와 웹브라우저 전반에서 수천 건의 고위험 취약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해당 모델은 기존 AI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자율형 보안 추론 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도 이른바 ‘미토스 충격’ 대응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는 11일 앤트로픽과 AI·사이버보안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간담회에는 외교부, 국가정보원, 금융위원회, 인공지능안전연구소(AISI),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금융보안원 등이 참석했다. 한국 측에서는 류제명 과기정통부 제2차관과 김명주 AISI 소장, 오진영 KISA 본부장 등이 참석해 마이클 셀리토 앤트로픽 글로벌 정책총괄과 협력 의제를 논의했다.
이번 논의는 지난 2월 열린 ‘2026 인도 AI 영향 정상회의’에서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과 다리오 아모데이 간 면담 이후 추진된 후속 협력 성격도 담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앤트로픽 측에 국내 기업·기관과의 사이버보안 협력을 제안하고 AI 기반 취약점 대응 체계 구축과 정보 공유 확대를 요청했다. 또 AI 기본법과 AI 안전·신뢰 체계 구축 방향에 대해서도 논의를 진행했다고 전했다.
류제명 제2차관은 “프론티어급 AI 모델의 성능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활용 범위도 확대되고 있어 AI 혁신과 더불어 국민·기업이 AI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며 “AI 모델 안전성 확보와 사이버보안 역량 강화를 위해 글로벌 AI 선도기업들과 적극 협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과기정통부는 최근 국내 AI·보안 업계와 긴급 간담회를 열고 미토스 기반 사이버 공격 가능성과 대응 전략을 논의했다. 실제 KISA는 앤트로픽 최신 모델을 활용한 모의해킹 과정에서 단 10여 분 만에 7개의 취약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들은 AI 산업의 경쟁 축 자체를 바꾸고 있다. 앞으로는 단순 챗봇이나 생성 기능을 넘어 보안·사이버전·인프라 운영까지 AI가 직접 개입하는 구조가 확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AI 경쟁, 이제는 ‘전력 소비 경쟁’으로 이동
업계에서는 앞으로 AI 기업들의 경쟁력이 인프라 운영 능력에서 갈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AI 서비스가 확대될수록 전력 소비 역시 급격히 증가한다. 초거대 모델 운영에는 수백 메가와트(MW) 단위 전력이 필요하며 장기적으로는 기가와트(GW)급 데이터센터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실제로 최근 AI 기업들은 단순 GPU 확보를 넘어 발전소 인근 데이터센터 구축, 원전 기반 전력 계약, 냉각 효율 개선 등 에너지 중심 전략까지 확대하고 있다.
스페이스X AI는 이번 발표에서 차세대 AI 시스템 운영에 필요한 컴퓨팅 수요가 지상 전력·냉각·부지 공급 속도를 넘어서는 상황이라며 장기적으로 궤도 기반 AI 컴퓨팅 인프라 협력 가능성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아직 현실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AI 산업이 단순 소프트웨어 경쟁을 넘어 인프라·전력·에너지·보안 중심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결국 생성형 AI 시장의 다음 경쟁은 누가 더 똑똑한 모델을 만드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GPU와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실제 서비스·보안 경쟁력으로 연결하느냐가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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