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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버튼 깜빡이면 내리십시오”…Z세대 푹빠진 ‘규칙괴담’ [트렌디깅]

‘단 하나의 이상 현상도 놓치지 말 것.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갈 것.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 그리고 8번 출구로 밖으로 나갈 것.’

AI로 생성한 이미지

‘단 하나의 이상 현상도 놓치지 말 것.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갈 것.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 그리고 8번 출구로 밖으로 나갈 것.’

지난해 10월 국내 개봉한 게임 원작 영화 ‘8번 출구’의 생존 규칙은 단순하다. 포스터 속 인물이 눈을 움직이거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이상 현상’을 무심코 지나쳐도 죽지는 않는다. 대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똑같은 지하 통로를 걷게 된다.

귀신도 괴물도 등장하지 않는 이 호러 영화는 개봉 한 달여 만에 누적 관객 44만 명을 넘겼다. ‘주온2’(44만 명), ‘주온: 끝의 시작’(41만 명) 등 기존 일본 공포영화의 국내 흥행 기록도 넘어섰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뭐가 무섭나 했는데 끝없이 반복되는 장소가 주는 공포가 있다”, “지하철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을 스릴러의 무대로 바꾼 게 인상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놓고 무서운 장면이 없어도 된다. ‘뒤를 돌아보지 말 것’, ‘이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갈 것’처럼 지켜야 할 규칙을 나열하지만, 정작 규칙을 어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최근 온라인과 게임, 영화, 웹소설을 넘나들며 인기를 끄는 이른바 ‘규칙 괴담’의 문법이다.

●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은근히 무섭다

한국에서 ‘규칙 괴담’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장르가 ‘나폴리탄 괴담’이다. 이름의 유래가 된 것은 2004년경 일본 인터넷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공포의 나폴리탄’. 숲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이 ‘어떤 식당’에서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고 나온 뒤 찜찜한 기분을 느낀다는 짧은 이야기다.

무서운 장면은 거의 없다. 대신 주인공이 먹은 것이 평범한 음식이 아니라 ‘먹어서는 안 될 무언가’였을 가능성만 남겨둔다. 무엇을 먹었는지, 왜 위험한지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가 빈칸을 상상하면서 공포가 만들어지는 구조다. 이 이야기는 2009년경 한국 인터넷에도 유입됐다.

국문학 연구자 박광은은 논문 ‘나폴리탄 괴담 장르의 형성과 그 성격’(2024)에서 미국에서 발생한 규칙형 괴담이 2010년대 중반 한국에 유입됐고, 2019년경 국내에서 나폴리탄 괴담과 결합했다고 분석했다. 서로 다른 계보의 인터넷 괴담이 만나 지금의 ‘규칙 괴담’ 문법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 인과관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공포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설의 고향’식 공포에는 대개 원인과 결과가 있다. ‘장화홍련전’처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과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있고, 귀신은 억울한 사연을 알리거나 복수하기 위해 나타난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원한이 풀리면 이야기도 끝난다.

규칙 괴담은 반대다.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지시부터 한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 ‘12시까지 야근하다 종이 울리면 바로 엎드려라’는 식이다. 안내문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빠져 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규칙을 어기면 무엇이 나타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규칙을 제대로 찾아내고 따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남겨둔다. 공포영화라기보다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다. 관객이나 독자는 이야기를 지켜보기만 하는 대신 ‘나라면 어떤 규칙을 선택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 인터넷 괴담에 할리우드까지 뛰어들었다

영화 ‘백룸’ 스틸컷. 사진=(주)바이포엠스튜디오, 리바이브콘텐츠(주)

노란 벽지와 형광등 아래 비슷한 공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백룸(Backrooms)’이나 지하철 통로에서 이상 현상을 찾아내야 하는 ‘8번 출구’도 이런 감각을 공유한다. 익숙해야 할 공간이 조금씩 어긋날 때 생기는 불안, 이른바 ‘리미널 스페이스’의 공포다.

국내 웹소설과 웹툰에서도 인터넷 괴담 속 세계에 사람이 들어가거나, 초현실적인 사건을 해결하는 조직의 활약을 그리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즐기던 괴담의 문법이 게임과 영화, 웹소설·웹툰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백룸’이 글로벌 흥행 돌풍을 일으키자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도 ‘괴담 IP’ 확보전에 뛰어들었다.

지난 7월 북미 연예매체 데드라인에 따르면 11개 스튜디오가 경쟁한 끝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제작사 앰블린 엔터테인먼트와 아마존 MGM 스튜디오가 유튜브 호러 시리즈 ‘만델라 카탈로그’의 영화 판권을 확보했다.

워너브라더스 픽처스 역시 경쟁 끝에 도시전설 바탕의 유튜브 단편 ‘사이렌 헤드’의 영화화 권리를 확보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에서 성장한 괴담이 대형 스튜디오가 탐내는 원천 IP로 넘어가고 있는 셈이다.

● 답을 안 알려주니 댓글에서 이야기가 계속된다

유튜브에서도 규칙 괴담은 인기 소재다. ‘버러지’, ‘종이필름’ 등 괴담 콘텐츠 창작자들은 규칙 괴담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공포 세계관을 만들고 가상의 상황을 영상으로 선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영상이 끝난 뒤다. 댓글에는 “15번 규칙은 사실 함정 같다”, “이 행동을 하면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처럼 시청자들의 추론이 이어진다. 제작자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시청자가 채우면서 이야기가 영상 밖에서도 계속된다.

규칙 괴담의 공포는 바로 이 ‘빈칸’에서 나온다. 무엇이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대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만 알려주고, 왜 그런지는 감춘다. 정답이 없으니 사람들은 댓글에서 서로의 해석을 비교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낸다.

콘텐츠를 혼자 감상하고 끝내기보다 댓글로 감상을 나누고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 익숙한 세대에게는 이런 불친절함마저 놀거리가 된다.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설명하지 않는 것이 이야기의 ‘구멍’이 아니라 각자 추리하고 이야기를 덧붙일 자리가 되는 셈이다.

이야기는 끝났는데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상을 닫지 않고 댓글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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