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는 변하지 않고 현상은 변한다는 이치는 답을 밖에서 찾은 것으로, 교(敎)이지 선(禪)이 아니다. 경허 선사는 한암의 말을 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AI생성이미지]
1899년 가을,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하룻밤을 묵은 한암 중원(漢巖 重遠, 1876~1951)은 경허(鏡虛, 1846~1912) 선사를 따라 해인사로 가고 있었다. 경허 선사는 조실로 와달라는 초청을 받아 가는 길이었다.
경허 선사가 중원 수좌에게 물었다.
“고인이 이르기를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물은 진(眞)이고 다리는 망(妄)이니, 망은 흐르나 진은 흐르지 않습니다.”
“이치는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물은 밤낮으로 흐르지만 흐르지 않는 도리가 있고, 다리는 밤낮으로 서 있지만 서 있지 않는 도리가 있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중국 양(梁)나라 부대사(傅大士, 497~569)의 게송이다. 진(眞)은 불변의 진여이고, 망(妄)은 생멸하는 현상이다. 진여는 변하지 않고 현상은 변한다는 이치는 교(敎)이지 선(禪)이 아니니, 이는 밖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경허 선사가 꼭 맞는 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제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다리를 무슨 까닭에 흐른다고 하였는가? 혹자는 과학 지식을 가지고서 원자도 지극히 미세하게 진동하므로 다리도 움직인다고 답할지 모르겠다만, 아주 엉뚱한 답이다. 이 물음에 대해 정확한 답을 모른다면, 감히 단언컨대 선(禪)에는 아직 문외한(門外漢)이다. 사족(蛇足)을 붙여 설명할 수밖에 없다.
우주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한 곳뿐이다. 이곳 외에 대상들은 다 움직인다. 동쪽 산이 물 위를 가는[東山水上行]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산은 가만히 서 있는데 내가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꾸로 생각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왜 물은 흐르지 않는다고 했는가? 마음은 안에 있고 대상은 밖에 있는 줄로 인식하는 것은 생각이 지어낸 착각이다. 내 마음이 밖에 있는 대상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대상이 움직이지 않는 이 자리에 비치는 것이다. 따라서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망상을 벗어나서 움직이지 않는 자리에 계합(契合)하면, 도수 안 맞는 흐릿한 안경을 벗고 초점이 딱 맞는 맑은 안경을 낀 것과 같다.
이 경계를 원오 극근(圓悟克勤)은 “천지가 몽땅 사문(沙門)의 일척안(一隻眼)이다”라 하였고, 방거사(龐居士)는 “불긋불긋 색채를 누가 말하는가. 저 큰 산이 티끌 한 점 없구나.[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라고 하였다. 천지가 죄다 심안(心眼)에 비친 영상일 뿐이며, 색채는 말할 것도 없고 산도 흙으로 된 물체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말이다. 한암(漢巖) 선사는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에서 이 경지를 “마음밖에 법이 없으니, 눈에 가득한 건 흰 눈과 달빛 뿐[心外無法 滿目雪月]”이라고 하였다.
대상을 보는 자리는 움직이지 않고, 대상은 다 움직인다. 그러나 대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자리에 비쳐서 그 자리와 둘이 아니므로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실상을 알고 보면,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근세의 백봉(白峯) 김기추(金起秋, 1908~ 1985) 거사는 보림삼관(寶林三關)을 제창하면서 “가고 옴이 없는 곳에 산 자는 무엇이며 죽는 자는 무엇인고?”라 묻고, 스스로 답하기를 “태산이 눈을 부릅뜨고 오니 녹수(綠水)가 귀를 가리고 간다”라고 하였다. 가고 오는 자리가 곧 가고 옴이 없는 곳임을 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다.
선(禪)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처럼 걸림 없이 살기 위한 공부도 아니요, 힐링 명상처럼 우아하게 생각하기는 더욱 아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려면 먼저 바르게 보아야 하니, 그러기 위해서 제 마음의 정체부터 알고자 하는 것이다. 생각이 자기인 줄로만 알아서는 나와 세상 사이에 벌어지는 지루한 싸움을 끝낼 수 없다.
경허 선사는 ‘시중(示衆)’ 법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저 참선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단지 자기 속에서 자기 주인공을 분명히 보아서 주인공이 대상에 섞여 들지도 않고 생사에 끌려가지도 않아 홀로 우뚝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한암 선사도 이 법어를 그대로 이어받아 오대산 상원사에서 설법하였다.
“대저 참선이란 사람을 놀라게 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다. 단지 현재의 한 생각을 돌이켜 비추어, 그 근원을 명백하게 알아서 마음이 대상에 섞여 들지도 않고 안으로 갈구하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굉장하고 신비한 수행이 아니라 생각을 돌이켜 자기 중심을 회복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선(禪)의 깨달음이 이러할 뿐이라면 너무 싱겁지 않은가? 그렇다. 선은 알고 보면 참 싱거운 것이지만, 또한 가장 중요한데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경허의 사상을 한암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것이 한국의 전통 선(禪)이다. 이 가르침이 오늘날 제대로 전승되고 있는가. 지금 한국 불교에서는 참선의 깨달음을 범인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특별한 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소위 선지식이 수행자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심오한(?) 법문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돈오돈수(頓悟頓修)만 해도 그렇다. 선(禪)에서는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깨달을 뿐이므로 돈오요, 바로 이 자리를 시시각각 알아차릴 뿐 업력(業力)을 논하지 않기 때문에 돈수다. 점수(漸修)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의 정체만 밝히기 때문에 점수를 말하지 않을 뿐이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더 말하겠다.
답은 바로 자기 마음 안에 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참선이 아니다. 마음에는 움직이지 않는 자리와 움직이는 생각이 있다. 움직이지 않는 자리는 어디인가? 반걸음만 물러나면 언제나 그 자리다. 움직이지 않는 이 자리가 분명하면, 움직이는 생각은 힘을 잃는다. 마음이 이 자리에 그치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왜 참선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가? 헛된 욕망 때문이다. 아잔 차 스님은 반야(깨달음)는 처음에는 작은 싹처럼 미약하다고 했다. 욕망이 앞서면 반야의 싹을 잡초로 오인하여 짓밟아 버리고는 다시 자기가 바라는 굉장한 깨달음을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비장한 각오로 공부에 임하는 것이 마치 진격하지는 않고 군가만 부르는 병사와도 같다.
깨달음도 앎이다. 앎에 두 가지가 있다. 생각하여 아는 앎이 있고 의심이 풀리면서 자연히 알아지는 앎이 있다. 깨달음은 경천동지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의심이 풀려 스스로 수긍하는 것일 뿐이다. 아하! 이래서 이 말을 했구나 하면서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노장(老莊)의 현학(玄學) 영향 때문인지, 불교에서도 높고 깊으면 무턱대고 좋은 것인 줄 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 이치란 얕게 보아서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깊게 보아도 또한 모르는 것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면서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성인과 다름없는 줄 알아야 비로소 향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선(善)과 악(惡) 양쪽을 오락가락하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선(禪)도 이와 비슷하다. 자기 마음이 붓다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수긍해야 비로소 마음이 제 자리에 그쳐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선의 깨달음은 여기까지다. 이를 넘으면 참으로 특별한 일이 되고 만다.
이상하 전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ksce21@hanmail.net
[1820호 / 2026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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