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은 옛 글을 인용하거나 응용하므로 원전을 기억해야 뜻을 알고, 사상·역사·문학 등 각 분야 지식을 쌓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오역이 많은 이유다. [AI생성이미지]
영화 ‘그 사람 경허’가 개봉된다고 한다. 근세에 혜성처럼 나타나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다가 만년에 홀연 해인사 조실을 나와서 저 북방의 오지 삼수갑산으로 종적을 감춰 전설이 되고 만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 선사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니 무척 반갑다. 하지만 대중의 호기심에 영합하느라 선사의 면모를 또 얼마나 왜곡할지 걱정이 앞선다.
경허는 선사이지만 당시 승려로서는 드물게 문장에도 능하여 문집 ‘경허집(鏡虛集)’을 남겼다. ‘경허집’에는 제자 혜월 혜명(慧月慧明)과 만공 월면(滿空月面)에게 준 전법게가 실려 있다. 조선의 선맥(禪脈)이 용암 혜언(龍巖慧彦, 1783~1841)에서 끊어졌다가 경허로부터 소생하였으니, 이 두 편의 전법게가 한국 불교사에서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이 중 혜월에게 준 전법게를 검토해 보겠다.
일체법이 了知一切法
자성 없음을 요달해 알지니 自性無所有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如是解法性
곧 노사나불을 보는 것이다 卽見盧舍那
세제를 의지하여 무문인을 거꾸로 제창하노라 依世諦 倒提唱無文印
청산 아래 한 선실(禪室)에서 이로써 도호한다(이 호를 주노라) 靑山脚一關 以相塗糊
임인년(1902) 음력 2월 하순에 경허가 혜월에게[水虎中春下瀚日 鏡虛爲慧月〕
앞부분은 원래 ‘화엄경’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에 있는 게송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게송만 보면 전법(傳法)한 게 아니라 수행에 도움 될 법어를 준 것이다. 그 아래 ‘세제를 의지하여 무문인을 거꾸로 제창하노라[依世諦 倒提唱無文印]’는 대목에서 오히려 전법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이 ‘경허법어(鏡虛法語)’(1981년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에 “온 세상을 사무쳐 쉬고 무생인을 제창하노니, 청산 다리 한 빗장으로써 서로 발라 붙이노라.[休世諦, 倒提唱, 無文印, 靑山脚, 一關以, 相塗糊.]”로 번역되어 있다. 행초서로 된 원문에서 ‘依’ 자를 ‘休’ 자로 잘못 보았고, 구두도 맞지 않다. ‘경허집’(1990년에 통도사 극락선원)에는 “세간의 형식은 놔두고 글자 없는 도장을 거꾸로 제창하노니, 청산다리 한 관문으로 서로 싸바르노라.[休世諦倒提唱無文印靑山脚一關以相塗糊]”라고 번역되어 있으며, 해운정사(海雲精舍) 사이트에는 “세상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 없는 도장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依世諦倒提唱 無文印靑山脚 一關以相塗糊]”로 번역되어 있다.
오역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청산 다리 한 빗장으로 서로 발라 붙인다’느니 ‘청산다리 한 관문으로 서로 싸바른다’느니 ‘고정된 진리의 상(相)에 풀을 바른다’느니 하는 등은 대체 무슨 말인가. 용궁보장(龍宮寶藏)에도 없을 희한한 말들이다. 언어를 벗어난 소식이라서 그런가? 무슨 말인지 낙처(落處)를 분명히 알기 어렵지, 선어(禪語)도 다 당시에 사용하여 의사소통하던 언어다.
‘依世諦 倒提唱無文印’은, 진제(眞諦)는 공(空)하여 주고받을 수 없으니 부득이 세제(世諦)인 언어를 의지해 제창한다는 말이다. 즉 이 ‘화엄경’ 게송으로 무문인을 제창하여 전해준다는 말인 것이다. 이 대목을 내가 과거에 “세제를 의지하여 무문인을 거꾸로 제창하라”로 잘못 번역한 것이 ‘경허집’(동국대학교출판부)과 ‘경허록’(불광출판사) 등에 실려 있다. 이 자리에서 정정(訂正)한다.
무문인은 글자 없는 도장인 심인(心印)이다. ‘靑山脚’은 청산 발치, 즉 청산 아래다. 한산시(寒山詩)에 “예로부터 많은 현인들이 모두 청산 아래 묻혀 있다.[自古多少賢 盡在靑山脚]”라고 하였다. ‘一關’의 關은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가 수행한 선실(禪室)이 사관(死關)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선실이다. ‘相塗糊’는 ‘대혜서장(大慧書狀)’ ‘답양교수(答梁敎授)’에 “또 도호(道號)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으니, 참으로 지어주고 싶구려. 쾌연거사로 칭하는 것이 좋겠소.[又承需道號 政欲相塗糊 可稱快然居士]”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호를 지어주는 것을 도호(塗糊)한다고 한 것이다. 도호는 호도(糊塗)와 같은 말로, 상대방을 더럽힌다는 뜻이다. 즉 호를 새삼 붙여주는 것이 양 교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을 더럽히는 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무슨 심오한 의미를 담아서 한 말은 아니고, 호를 지어주는 것을 격조 있게 표현한 말일 뿐이다. 사집과(四集科)에 속한 ‘대혜서장’에 나오는 말도 모르고 상상에 맡겨 번역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
선(禪)에서는 언어 이전이라는 말을 쓴다. 언어 이전이라면, 언어를 애써 외면하고서 캄캄한 심연(深淵)을 들여다보고 있으라는 말인가? 영어를 안 배운 사람은 영어로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언어를 알지라도 더 들어가서 왜 이 말을 했는지까지 알아야 비로소 남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말귀가 어두워 동문서답하는 것이 선(禪)이겠는가.
언어 이전이라느니 언어를 벗어난다느니 하는 말은 무지(無知)를 포장하기에 딱 좋은 말이다. 근세의 석전 정호(石顚鼎鎬, 1870~1948) 스님은 ‘선(禪)의 불립문자(不立文字)는 과오가 공로보다 크다’라는 글에서 “불립문자라는 호신부를 걸머지고 고선(枯禪, 죽은 참선)만 해댄다”라고 당시의 선객(禪客)들을 통렬히 비판한 바 있다.
참으로 언어 이전을 알고 언어를 벗어나려면 당당히 언어를 직면하여 그 언어가 가리키는 뜻을 바로 보아야 한다. 동쪽으로 가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서쪽으로 가면서 언어 이전의 소식을 알았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선(禪)의 언어는 군더더기 설명이 없으므로 더더욱 정확히 알아야 나아가 언어 이전의 소식도 알 수 있다.
한문은 중국어와도 달라서 글자와 단어를 외고 문법을 배우고 사전을 찾는 정도로는 읽어낼 수 없다. 사서삼경 등 옛날 글들을 인용하거나 응용하여 자기 언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원전을 기억해야 글뜻을 알 수 있다. 기초적인 지식을 쌓는 데만도 읽고 숙지해야 할 교재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한문은 최소 10년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해야 안목이 조금 열린다. 그런 다음에 또 사상, 역사, 문학 등 각 분야의 지식을 쌓아야 한문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불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요즘 한문이 불교를 망쳤다는 거친 말도 서슴없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 수천 년 동안 한문 불전을 읽은 사람들은 다 모르고 불교를 공부한 멍청이인가. 한문이 죽은 글이 된 세상에서 반박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한문은 어렵고 어휘도 매우 많지만, 또한 그만큼 정교한 문자이다. 한문이 애매모호한 문자라면 과거 중국이 세계 최강국일 수 있었겠는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와 ‘다’를 구별하지 못한다. ‘모두’는 여럿을 한 덩어리로 뭉뚱그린 말이고, ‘다’는 ‘각각 다’라는 뜻이다. 한문에서 도(都)는 ‘모두’이고 공(共)은 ‘함께’이며, 개(皆)는 ‘다’이다. 예컨대 ‘반야심경’의 ‘五蘊皆空’은 오온이 함께 공상(共相)으로 공(空)하다는 말이 아니라, 오온의 자상(自相)이 다 공하다는 말이다. 한문을 한글로 잘못 번역하여 ‘오온이 모두 공하다’라 해놓고서 도리어 한문을 탓해서야 되겠는가.
앞으로 AI가 한문을 번역할 것이다. 그러나 AI가 명민하여 아무리 잘 번역해 놓은들 읽는 사람이 무식하여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오해하면 대책 있겠는가. AI를 사용하는 사람이 무식하면 또 어쩔 것인가. 어쩌면 백가쟁명(百家爭鳴)하는 희한한 판국이 또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하 전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ksce21@hanmail.net
[1818호 / 2026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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