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8개월 만에 문화재보호법 제정
문화를 ‘제2의 경제’라는 개념 이론화
中보다 49년 일찍 ‘무형문화재’ 도입
서구 문화 확산에 맞서 민족문화 지향
1967년 국악사 양성소 건립 현장 모습.
1962년 1월 10일. 하루 세끼도 못 먹는 국민이 수두룩하던 시절, 군사정부는 ‘문화재보호법’을 전격 제정했다. 5·16 혁명 후 겨우 8개월 만의 일이었다. 굶어 죽는 인명을 보호해야 할 판에 문화재를 보호하겠다는 선언은 당시로선 이해할 수 없는 정신 나간 결정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64년이 흐른 2026년, K-pop이 세계를 석권하고 대한민국 영화와 드라마가 전 세계인의 일상을 파고든 지금.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정책을 외면하던 보수·자유진영 일각에서 대한민국 문화정책의 원형을 다시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문화 없는 경제발전은 누각과 같다”라고 말했던 박정희 대통령. 그가 1960~70년대 추진한 ‘문예중흥’ 정책은 오랜 기간 정치적 논쟁 속에 묻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일부 연구는 해당 시기를 ‘문화 통제의 시대’로 규정했고, 보수·자유진영조차 ‘경제개발’만 부각시키며 문화정책은 외면해왔다.
하지만 최근 재평가 움직임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절대빈곤 속에서도 문화를 국가 생존의 필수 요소로 인식하고 투자한 점, 형태도 없는 ‘무형문화재’ 개념을 세계에 앞서 도입한 점, ‘제2 경제’라는 독창적 개념으로 경제와 문화의 동시 발전을 추구한 점 등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예술적 소양을 갖춘 드문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을 둘러싼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이들조차 인정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가 탁월한 엘리트이자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서예에 매달렸던 것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은 작곡이 가능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만든 〈새마을 노래〉는 일본 요나누키 장음계를 활용한 곡으로, 완성도가 수준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각에서는 이 노래가 일본 군가풍이라고 비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도레미솔라의 다섯 음으로 구성된 요나누키 음계는 경쾌한 행진곡을 만들기에 적합한 음계일 뿐이다. 흥미롭게도 1980년대 운동권의 애창곡 〈해방가〉 역시 같은 음계로 만들어졌다. 교사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이 음계의 정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다만 실용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문화를 국가 수단이자 호국의 도구로
진흥왕 유겐트 ‘화랑’을 청년 모범 제시
60년전 문화 인프라 한류 바람 밑거름
반정부세력 투쟁에 전통문화 활용 ‘역설’
◇문화적 소양의 의미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문화에 대한 ‘소양’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취향’과는 차원이 다른 내면에 축적된 정서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양은 그의 문화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문화를 정치적 도구로만 활용하려 했다면, 무형문화재라는 형태도 없고 경제적 가치도 없는 개념에 국가 자원을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가 가진 힘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했다. 1969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그 나라의 국력이 안으로 충실하고 밖으로 뻗어 나가는 시기에는 찬란한 문화의 꽃이 피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나 로마 문화도 그 나라가 가장 융성하고 발전하여 국력이 충실한 시기에 더 발전되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전투력 최강이었던 스파르타 대신 아테네를 역사의 승자로 만든 것은 문화였고, 전쟁 천재 알렉산드로스를 대왕의 자리에 올린 것도 헬레니즘이라는 문화유산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통해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다. 진정한 민족국가 건설이 정치적·경제적 자립뿐 아니라 문화적 자립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화랑정신이 왕성할 때 신라의 국운이 융성했으나, 국민들의 생활이 나태해지자 화랑도 정신의 해이는 신라문화의 타락과 국운의 쇠망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삼국통일 시대와 세종대왕 시절처럼 조화와 창조의 정신이 풍성했을 때는 문무가 함께 융성하여 국운이 떨쳤지만, 이런 정신이 쇠퇴하면 민족문화는 물론 국력마저 기울었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이었다.
문제는 당시 대한민국에 문화의 씨앗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라 살림의 절반을 원조받는 처지에 문화예술이 설 자리는 없어야 정상이었다. 일반적 통념으로는 제법 살 만해지고 정신적 여유가 생겨야 비로소 문화에 대한 흥미가 생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달랐다. 정치, 경제, 문화의 세 요소가 동시에 어우러져야 민족중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제2 경제’라는 독창적 개념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의식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는 ‘제2 경제’라는 개념에 있다. 1968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제2 경제라는 말은 학술적 용어도 개념도 아닙니다. 내가 생각해 낸 한 단어인데, 적당한 말로 고쳐도 무방합니다. 다만 그 뜻은 우리가 경제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외형적 면과 동시에 정신적인 자세가 올 바라야만 경제건설이 효과적으로 촉진되지 않겠느냐는 취지입니다.”
이제껏 이 설명은 도덕과 윤리에만 초점이 맞춰져 해석되었다. 그러나 ‘제2 경제’는 그것을 넘어 ‘문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처한 딜레마가 있었다. 독일은 전후 경제 복구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되살리기만 하면 되었다. 원래 있던 것이니 쉬웠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것이 아예 없었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전통은 단절되었고, 해방 후에는 무비판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며 자학적 체념이 팽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없던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포장하여 경제와 병행하며 민족중흥에 도전했다. 이것이 ‘제2 경제’의 진짜 의미다.
문화는 문명을 구성하는 개별적 요소다. 문명을 거대한 양탄자로 비유한다면 문화는 그것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이다. 하나가 물질이라면 다른 하나는 정신이다. 문화는 물질과 정신이 반드시 동행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1967년 12월 9일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국립국악원 준공식에 참석해 전통 국악기들을 둘러보고 있다.
◇무형문화재 개념의 혁신성
이런 인식이 있었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빈곤의 한가운데서도 문화재보호법을 만들 수 있었다. 문화재보호법 제2조는 문화재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정의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무형문화재’ 개념이다. 위치도 고정되지 않고 형태도 정해지지 않은 것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1964년 종묘제례악이 제1호로, 1966년 강강술래가 8호로 지정되었다. 1966년이면 경제 부문에서 정신없이 헤매던 시기를 갓 벗어난 때였다. 문화에 대한 신념과 필요성이 없었다면, 한참 뒤로 미뤄두었을 사안이었다. 참고로 중국이 무형문화재법을 제정한 것은 2011년으로 우리나라보다 49년이나 늦었다.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문화정책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의식은 한편으로 깊은 위기의식의 소산이기도 했다. 196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심화 되고, 공산주의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영역을 확대하던 때였다. 쿠바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에 의해 공산화되었고, 베트남전쟁은 결국 월맹의 승리로 끝났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1966년부터 10년 가까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수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잔인한 문화대혁명은 유럽과 일본의 신좌파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68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1968년 베트남의 구정공세를 시작으로 세계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스 68혁명은 ‘여자 기숙사 개방하라’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되어 ‘금지를 금지하라’, ‘파괴는 창조의 열정이다’라는 슬로건으로 확장되며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다.
대중문화 역시 반항적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비틀즈는 반항적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고, 히피문화가 꽃피었다.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해체주의 등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했고, 팝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 기존 예술의 틀을 거부했다.
이런 혁명적이고 가치전복적인 서구 문화환경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무분별한 서구문화의 침투로 여겨졌다. 인간개조를 통한 새로운 국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칠 여지가 충분했다. 광복과 함께 들어온 서구 문명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고, 전통문화에 모든 책임을 돌리려는 풍조가 생겨났다.
새롭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받아들이는 쪽의 체력이 뒷받침될 때나 가능하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그럴 여력이 전혀 없었다. 서구 문명을 흡수하기는커녕 대책 없이 빨려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민족문화를 지향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문예중흥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확립하고 허약했던 대한민국을 지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그런 것들과 차별화되는 문화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국에서 출발한 문화 중흥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중흥은 호국에서 출발했다. 진흥왕 유겐트였던 화랑을 역사책에서 끄집어내 청년들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휘호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민족주의자이자 국가주의자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문화정책의 공식은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 외래문화의 창조적 수용 + 문화 활동의 자율성과 창조성 고취 = 참다운 민족문화의 형성’으로 요약된다. 그가 찾아낸 전승해야 할 유산은 향약과 계, 화랑정신, 서민문화, 실학이었다.
구체적 정책으로는 공문서의 한글 전용, 문화재 발굴 보존, 고전의 국역, 위인 선열 추모사업 및 성역화, 도서관과 박물관 건립, 전국적 문화예술사업 지원, 사찰·서원 복원, 신라 고도 정화, 성곽 및 전적지 정화, 충효 정신 함양 등이 추진되었다.
◇한글과 세종대왕의 강조
1970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했고, 1975년 건립한 공연예술장에 세종문화회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종을 높이고 민족문화의 정수인 한글을 강제하여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려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문화 지도는 여기서 나왔다. 싫든 좋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무형문화재 제도, 한글 전용 등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그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화 대통령인가, 아닌가
박정희는 “문화 대통령”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는 문화가 가진 힘을 알았고 믿었으며 실천했다. 진정한 민족국가의 건설은 정치적, 경제적 자립만이 아닌 문화적 자립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 신념은 5·16 혁명 후 8개월 만에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으로 가시화되었고, ‘제2 경제’라는 독창적 개념으로 이론화되었으며, 전국에 펼쳐진 문화 인프라로 구체화 되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예술 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 1970년대 도발적인 청년문화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한 것이 그 증거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 앙드레 말로가 될 수 없었다. 그에게 문화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수단이자 호국(護國)의 도구였다. 민족주의자이자 국가주의자로서 박정희가 추구한 문화는 자율적 창조성보다는 민족 정체성 확립과 국가 수호라는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문화사에 남긴 족적은 부인할 수 없다. 먹고살기도 힘겨운 1960년대에 문화를 사치재가 아닌 필수재로 인식하고 투자한 것, 형태도 없는 무형문화재를 지정하여 보호한 것, 경제발전과 문화발전을 동시에 추구한 것,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모색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화인프라의 상당 부분이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구축되었다.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각종 박물관과 도서관, 복원된 문화재들, 무형문화재 제도 등이 그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억압하려 했던 청년문화조차 그가 발굴하고 지정한 전통문화를 반정부 투쟁의 무기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정책은 그가 의도했던 것 이상의 역사적 역할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 평가와 현실적 증명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하는 시각은 다양하지만,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지도자였다는 점만큼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가 1960년대에 “문화 없는 경제발전은 누각과 같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반세기를 앞서간 통찰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K-pop, 영화, 드라마, 웹툰 등이 전 세계를 석권하며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강조한 문화의 중요성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증명되고 있다.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과 그 명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우리는 그 자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졌던 문화에 대한 소양과 신념, 그리고 실천력은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무이한 것이었다.문화로 국가를 설계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성공과 실패,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남겼지만, 대한민국 문화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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