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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26 박정희] (56) 문화시설과 방송 정책, 문화시설·방송 인프라 확충 ‘민족문화 중흥’ 주창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경제개발과 함께 문화시설 확충에 적극 나섰다.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국립박물관, 한국민속촌 등 대규모 국립 문화시설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립되면서 현대 대한민국 문화 인프라의 골격이 형성됐다.

세종문화회관 등 주요 도시에 문화회관

문화재 복원·국악 진흥 등 정통성 보완

각 시군 문화원은 지역 문화 활동 거점

1980년대 공연예술 발전 인프라 토대

시설은 화려해도 무대 위 내용 엄격 제한

1979년 개최된 제1회 강변가요제.

청년들의 음악실 세시봉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던 멤버들이 주한외교관 초청 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

◇문화 인프라의 급속한 확충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경제개발과 함께 문화시설 확충에 적극 나섰다.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국립박물관, 한국민속촌 등 대규모 국립 문화시설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립되면서 현대 대한민국 문화 인프라의 골격이 형성됐다.

1973년 남산에 새롭게 문을 연 국립극장은 대극장과 소극장을 갖춘 본격적인 공연예술 전용 공간으로 국악과 전통 공연의 거점이 됐다.

1978년 완공된 세종문화회관은 3,022석 규모의 대극장을 갖춘 당시 동양 최대 수준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동양 최대 규모의 파이프오르간과 최신 음향 시설을 갖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해외 유명 공연단의 내한 공연 장소로 활용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부산시민회관(1973년), 대구시민회관(1975년), 광주문화예술회관(1978년) 등 주요 도시에도 문화회관이 건립되면서 지방 공연예술의 기반이 마련됐다. 비록 서울과의 격차가 컸지만, 지방에도 본격적인 공연장이 생긴 것은 의미 있는 변화였다.

박물관 분야에서도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이 확장됐고, 경주국립박물관(1975년 신축), 부여국립박물관, 공주국립박물관 등 주요 문화재 소재지에 국립박물관이 정비됐다.1975년 설립된 국립민속박물관과 1974년 개관한 한국민속촌은 전통문화 보존과 전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같은 해 출범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 보존과학의 체계를 갖추는 계기가 됐다.

무형문화재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고 인간문화재 지정이 활발히 이뤄진 것도 이 시기였다. 경복궁, 창덕궁 등 고궁 복원 사업도 본격화돼 전통문화 보존의 물리적 토대가 마련됐다.

도서관 확충도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1963년 도서관법 제정 이후 ‘1군 1도서관’ 목표 아래 전국적으로 공공도서관이 늘어났다. 1962년 63개에 불과하던 공공도서관은 1979년 179개로 증가했다.

1966년 지방문화사업조성법에 따라 각 시군에 문화원이 설립되면서 지역 문화 활동의 거점이 조성됐다. 정부는 “국민의 교양 향상과 문화생활 증진”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실제로 많은 국민이 공공도서관을 통해 책을 접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도시 지역 주민들에게 도서관은 중요한 문화 공간이 됐다.

◇민족문화 중흥이라는 이념과 통제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시설 정책에는 ‘민족문화 중흥’이라는 이념적 지향이 깔려 있었다. 1968년 발표된 ‘국민교육헌장’과 1974년 시작된 ‘민족문화 중흥 5개년 계획’은 이러한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전통 문화재 복원, 국악 진흥, 민속 보존 등이 강조되었고, 이를 위한 시설 투자가 이뤄졌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전통과 민족을 내세워 정통성을 보완하려 했다. 특히 유신 체제(1972년) 이후에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논리 아래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민족문화 담론이 동원됐다.

그러나 화려한 시설과 달리 무대 위 내용은 엄격히 통제됐다. 1970년대 중반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준비했던 한 연출가는 “대본을 세 차례나 수정해야 했다. 사회 비판적 대사는 모두 삭제 요구를 받았다”라고 증언했다. 1976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공연 작품 선정 과정에서도 정부는 “민족정기 고취”와 “건전한 문화” 기준을 내세워 레퍼토리를 제한했다.

도서관은 사상 통제의 도구로도 기능했다. 공공도서관 장서 구성에 금서 목록이 적용됐고, 좌익 성향 작가나 비판적 지식인의 저서는 배제됐다. 1970년대 한 사서는 “매년 문화공보부에서 내려오는 금서 목록을 받아 서가에서 제외해야 했다. 마르크스 관련 서적은 물론이고 사회 비판 소설도 포함됐다”라고 밝혔다.

문화원은 향토 문화 보존과 주민 문화 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됐지만, 실제로는 관변 행사나 정부 시책 홍보의 거점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새마을운동 교육, 반공 강연, 정부 정책 설명회 등이 문화원의 주요 프로그램을 차지했다.

◇지역 불균형과 하드웨어 중심 정책

시설 건립의 지역 불균형도 심각한 문제였다. 초기에는 서울 중심의 대형 시설 건립에 집중됐고, 지방은 1970년대 중후반이 돼서야 본격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1970년대 후반 통계를 보면, 서울에 전체 문화시설의 40% 이상이 집중돼 있었고, 1인당 문화시설 면적은 서울과 지방 간 5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하드웨어 중심 정책의 한계도 분명했다. 건물과 시설은 늘어났지만 이를 운영할 전문 인력 양성이나 프로그램 개발은 뒤따르지 못했다. 1977년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지방 문화회관의 연간 가동률은 평균 30%에 불과했다. 일부 지방 문화시설은 준공 후에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관공서 행사나 집회 장소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화 예산 배분도 문제였다. 1970년대 전체 국가 예산에서 문화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0.3~0.5% 수준으로 경제개발이나 국방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1975년 문화공보부 예산 분석을 보면, 전체 예산의 60% 이상이 시설비였고, 예술 창작 지원은 10%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문화예술인들은 저항을 시도했다. 1970년대 중반 소극장 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대형 공간에서 할 수 없는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작품을 올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명동의 드라마센터, 샘터사극장, 카페씨어터 등 민간 소극장에서는 검열을 우회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이 시기의 성과를 인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원로 연극인은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공연장이 생기면서 공연예술의 질적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다.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공연예술의 발전은 이 시기 인프라가 토대가 됐다”라고 평가했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양적 성장이 질적 발전을 담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한 문화정책 연구자는 “건물은 늘었지만, 표현의 자유는 억압됐다. 시설 확충이 문화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 통제의 도구가 됐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시설 정책은 현대적 문화 인프라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지만, 국가 주도의 획일적 운영, 표현의 자유 제약, 지역 불균형, 소프트웨어 부족, 정치적 도구화 등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인프라 구축이라는 물질적 기반 조성과 검열과 통제라는 정신적 억압이 동시에 작동한 모순적 유산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국 TV 시청 계획에 중계소 대거 설치

컬러 TV 도입 추진·방송기술연구소 설립

방송 기술·제작 수준 아시아 최상위권

정부 강력한 통제 받고 홍보 도구 전락

검열·억압 심했지만 성과는 부정 못해

◇박정희 대통령 시대 방송정책: 통제와 발전의 이중주

박정희 대통령의 방송정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전국 방송망 구축이었다. 1961년 서울과 일부 대도시에만 국한됐던 TV 방송은 1979년까지 전국 대부분 지역으로 확대됐다. 1960년대 초 전국에 10여 개에 불과했던 TV 중계소는 1970년대 말 200개 이상으로 늘었다.

백두대간 주요 산봉우리마다 중계탑이 세워졌고, 강원도 산간 마을, 전남 섬 지역까지 TV 시청이 가능해졌다. 1971년 정부는 ‘전국 TV 시청권 확대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매년 30~40개씩 중계소를 신설했다. 산악 지형이 많은 한국에서 이는 대단한 토목 공사였다. 험한 산길에 장비를 운반하고 송신 시설을 설치하는 데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됐다.

TV 보급률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64년 전국 3만 대(보급률 0.3%)에 불과했던 TV는 1970년 37만 대(4.5%), 1975년 200만 대(22%), 1979년 500만 대(보급률 50% 이상)로 급증했다. 15년 만에 보급률이 10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공동시청 시설은 농촌 지역의 정보 격차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전국 3만여 개 마을에 공동시청 시설이 설치됐다. 마을회관에 TV 1~2대를 놓고 주민들이 함께 모여 시청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적으로 TV를 살 여력이 없던 농민들도 뉴스와 교양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 됐다.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도농 간 정보 격차는 크게 줄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컬러 TV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1976년 시범방송을 시작했고, 1980년 12월 1일 완전 컬러 본방송에 들어갔다. 컬러 방송을 위해 송출 장비, 카메라, 편집 장비를 모두 교체해야 했고,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는 이를 위해 대규모 예산을 투입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최신 장비를 도입했고, 기술자들을 해외연수 보냈다. 방송 기술자 양성에도 힘썼다. 1973년 KBS 공영화와 함께 ‘KBS 기술연구소’가 설립됐다. 송출 기술, 음향 기술, 영상 기술 등을 연구하고 인력을 교육했다.

방송통신대학에 방송 관련 학과가 생겼고, 주요 대학에도 신문방송학과가 늘어나 체계적인 방송 교육이 시작됐다.

◇제작 인프라의 본격 구축과 제작 확대

1970년대 들어 방송 제작 인프라가 본격적으로 갖춰졌다. 여의도 KBS 신사옥(1973년 완공)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방송국으로 대형 스튜디오 여러 개, 최신 편집실, 음향실 등을 갖췄다. MBC 상암동 사옥(1978년 완공)도 대형 방송 제작 시설로 드라마 세트장, 음악 스튜디오, 야외 촬영장 등을 구비했다.

이런 시설은 단순히 건물이 아니었다. 수백 명의 PD, 작가, 기술진이 일하는 산업 공간이었고, 방송을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시킨 기반이 됐다.

검열과 통제가 심했지만, 역설적으로 드라마 제작 기술은 크게 발전했다. ‘수사반장’(1971~1989)은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최장수 시리즈가 됐다. 18년간 방영되며 1천 회를 넘겼다. 비록 반공 메시지가 강했지만,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는 인정받았다. ‘전원일기’도 박정희 대통령 시대 말기에 기획돼 인간미 넘치는 장수 드라마가 됐다.

다큐멘터리 분야에서도 우수한 작품들이 제작됐다. ‘한국의 발견’ 시리즈는 전국의 문화재와 자연을 소개했고, 촬영 기법이 수준급이었다. ‘역사기행’은 한국사의 주요 현장을 찾아가며, 학술적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돼 교육적 가치가 높았다. ‘전통공예’ 시리즈는 사라져가는 전통 기술을 기록해 훗날 무형문화재 보존에도 귀중한 자료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 진흥을 국가 목표로 삼았고, 이는 방송에도 반영됐다. ‘TV 과학 교실’은 1970년대 대표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물리, 화학, 생물을 쉽게 풀어 설명했다.

‘대학 강좌’는 방송통신대학과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대학에 가지 못한 성인들이 방송으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한글 교실’은 TV로 한글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으로 수십만 명이 이 프로그램으로 글을 깨쳤다고 추정된다.

방송이 산업화하면서 전문 방송인들이 생겨났다. 아나운서는 선망의 직업이 됐고, KBS와 MBC는 매년 공채 시험을 치렀다. PD와 작가도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연예인 매니지먼트도 이 시기 시작됐다. 가수와 탤런트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기획사들이 생겼다. 오늘날 K-pop 산업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TV는 전 국민에게 공통의 문화 경험을 제공했다. 서울 사람이나 시골 사람이나 같은 뉴스를 보고, 같은 드라마를 봤다. 이는 국민 통합에 기여했다. ‘전국 노래자랑’은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 주민들의 노래를 선보였고, 스포츠 중계도 국민들이 함께 응원하며 일체감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

1973년 KBS 공영화는 대한민국 방송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비록 정부 통제가 강했지만, 제도적으로는 공영방송 틀이 만들어졌다. 수신료 제도가 정착됐고, 방송의 공적 책임 개념도 생겼다.

◇검열과 통제의 실상

그러나 방송은 가장 강력한 정부 통제를 받는 매체였다. 1973년 통합 KBS 체제가 출범하면서 방송은 사실상 정부의 선전 도구가 됐다. 뉴스는 정권 찬양 일색이었고, 비판적 내용은 원천 차단됐다. 표현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약됐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 이후 정부의 문화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새마을 노래’, ‘잘 살아 보세’는 전국 방송을 통해 매일 반복 방송되었고, 정책 선전 가요가 대량 제작되었다.

1970년대 말 대한민국의 방송 기술과 제작 수준은 아시아에서 상위권이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방송 기술을 수출하기도 했고, KBS는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60~70년대 방송계에 입문한 인력들은 1980~90년대 대한민국 방송의 중추가 됐다. 당시 구축된 방송 인프라와 제작 시스템은 1980~90년대 대한민국 방송산업이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방송정책은 분명 억압과 통제가 핵심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약됐고, 방송은 정권 홍보 도구로 전락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방송 인프라 확대, 기술 발전, 산업 기반 구축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성과들이 민주적 방식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발전과 억압은 별개로 평가해야 한다. 인프라가 확대됐다고 해서 검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검열이 심했다고 해서 모든 성과를 부정할 수도 없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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