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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026 박정희] (53) 문화정책 재조명 “경제발전·문화발전은 분리될 수 없는 양 날개”

1971년 6월 1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국악예술제.

1971년 6월 1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국악예술제.

박정희 대통령은 1960~1970년대 경제개발에 매진하면서도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체계적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다. 1961년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82달러가 채 안 되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초가집과 판잣집이 즐비했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예술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한다는 것은 일견 시기상조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과 문화발전이 분리될 수 없는 양 날개라고 인식했다. 1973년 발표된 ‘문예중흥 선언’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문화정책은 현재 대한민국 문화예술 제도의 근간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 K-컬처가 전 세계를 석권하는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저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문화 철학을 명확히 밝혔다. “개인의 창조적 능력은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생활 가운데서만 길러질 수 있다”라며 “협동적 민주사회는 개인의 독창적인 창의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풍요롭고 다양한 문화생활을 제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문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여가가 아닌, 국민의 창조적 역량을 개발하는 핵심 수단으로 본 것이다.

그는 당시 문화가 일부 특권층만의 전유물이었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문화는 일부 직업적인 인사들만이 누릴 수 있었으며 농어민이나 근로자는 이를 구경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라며 “일부 국민들은 사치와 방종을 문화로 착각하고, 외국산 상표만 좋은 것으로 알며, 서양풍만 풍기면 문화인 줄 아는 사이비 문화관념이 만연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당시 사회 현실을 정확히 꼬집은 것이었다. 해방 이후 서구 문물이 무분별하게 들어오면서 전통문화는 낡고 후진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서양 것이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다. 특히 서울과 대도시에서는 일본과 미국 문화의 아류가 횡행했고, 지방에서는 문화적 혜택 자체를 접하기 어려운 문화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어린이대공원 개원식 테이프 절단 모습.

◇문화정책의 시대적 배경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정책을 추진하던 1960~1970년대는 세계사적 격동의 시기였다. 쿠바는 공산화되었고, 베트남전쟁은 월맹의 승리로 끝났다.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10년 가까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68년은 세계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난 해였다.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한 달간 일상을 마비시켰고 1,000만 명이 파업을 벌였다. ‘여자 기숙사 개방하라’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시위는 ‘금지를 금지하라’, ‘파괴는 창조의 열정이다’로 확장되며 사회 전반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일본에서도 1968년 6월 마오쩌둥 포스터가 도쿄대학 정문을 장식했고, 경찰 수천 명과 3일간 유혈 투쟁이 벌어졌다. 비틀즈는 반항적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고, 히피문화가 꽃피었다. 포스트모더니즘, 팝아트, 미니스커트 등 파격적 혁신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한 혁명적이고, 가치전복적인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침투는 새로운 국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협이었다. 민족문화를 지향한 ‘문예중흥’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허약했던 국가를 지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울진·삼척 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해 군경과 민간인 60여 명이 사망했다.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문화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또 하나의 완전한 수단’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권위에 저항하는 혁명적 기운이 넘치던 시기에 중앙집권적 경제발전을 선택한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국민총화 수단으로 문화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동시에 주체적인 민족문화를 발굴하고 국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문화적 인프라 확충이 절실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국립극장 개관식 테이프 절단 모습.

문화법 제정 예술 활동 법적기반 마련

1968년엔 전 국민 5.7번 영화관 찾아

지방문화 육성에 전국 문화원 230여개

오늘날 전 세계 석권하는 K-컬처 토대

◇1960년대, 문화 행정 체계 구축의 시작

1961년 5·16 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문화 행정 체계를 전면 재편했다. 공보부가 발족 되면서 국립영화제작소가 신설되고, 외무부의 대외선전부와 문교부 관장의 영화·공연·연예 업무가 공보부로 이관되었다. 국립극장과 국립국악원도 공보부 관할이 되었다.

1968년 문화공보부로 개편되면서 문교부가 관장했던 문화재관리국과 박물관을 포함한 문화예술 업무를 이관받아 문화 및 공보 업무의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문화공보부의 주요 업무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예술 각 분야의 연구 창작 및 보급, 민족문화예술의 진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62년 5월 건축, 국악, 무용, 문학, 미술, 사진, 연극, 연예, 영화, 음악 등 10개 분야의 예술협회가 결합하여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를 창립했다. 예총은 공보부에서 사단법인체로 설립·인가되었고, 1964년 12월 정부 지원으로 예총회관을 건립했다. 이 단체는 정부의 문화정책과 관련해 의견수렴은 물론 정책 집행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총의 창립은 흩어져 있던 예술인들을 조직화하고, 정부와 예술계 간의 소통 창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 문화입법은 국립극장설치법, 저작권법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부터는 1970년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유지되는 문화예술 관련 법률이 대부분 제정되었다.

공연법, 문화재보호법,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방송법, 영화법, 음반에 관한 법률 등이 이 시기에 제정되어 문화예술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법제 정비는 문화예술이 단순히 민간의 자율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발전시켜야 할 대상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1972년 8월 25일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식 참석 모습.

◇영화산업의 기반 조성

1962년 영화법 제정은 대한민국 영화 산업화의 첫 단추였다. 영세했던 영화사들을 정리하고 제작 실적이 있는 업자만 외화 수입을 허가하는 ‘교차 보조 시스템’을 도입하여 안정적인 제작 기반을 조성했다. 제작 편수는 1962년 113편에서 1969년 229편으로 증가했고, 관객도 1961년 5,800만 명에서 1969년 1억7,300만 명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1968년 전 국민이 평균 5.7번이나 영화관을 찾아 2012년 전까지 가장 영화를 많이 본 시기였다. 대한민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이다. 영화산업의 자세한 발전 과정과 주요 작품, 감독들에 대해서는 연재 6 ‘영화산업을 통한 민족중흥’에서 상세히 다룬다.

1961년 MBC라디오, 1963년 DBS라디오, 1964년 TBS라디오가 개국했고, 1961년 KBS TV 방송이 시작되었으며, 1964년 TBC, 1969년 MBC-TV가 개국하며 방송 3파전이 시작되었다. 텔레비전 보급 대수는 1969년 19만 대에서 1979년 570만 대를 돌파하며 본격적인 TV 시대가 열렸다. 방송 인프라 구축과 방송정책의 구체적 내용은 연재 5 ‘문화시설과 방송정책을 통한 민족중흥’에서 다룬다.

◇한글 전용 정책의 명암

1968년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1970년 대통령 담화를 통해 한자 폐지 및 한글 전용 정책이 본격 추진되었다. 해방 당시 78%에 달했던 문맹률이 1970년대에는 10% 이하로 급격히 떨어졌다. 한자를 모르는 일반 국민들도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면서 교육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한글 전용은 국민의 지적 능력 개발에도 기여했다. 어려운 한자를 암기하는 데 소비되던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학습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이 재조명되며 민족 자긍심 고취에도 일조했다.

그러나 한글 전용 정책은 심각한 부작용도 낳았다. 한자 교육이 중단되면서 젊은 세대가 한문으로 기록된 고전과 역사 자료를 읽지 못하게 되었다. 수천 년간 축적된 동양 고전과 우리 선조들의 기록이 접근 불가능한 ‘죽은 문자’가 되어버렸다.

세대 간 문화 단절도 심각했다. 한자 세대와 한글세대 사이에 의사소통의 장벽이 생겼고, 전통문화의 계승이 어려워졌다. 또한, 한자어 개념 이해 부족으로 학문의 깊이가 얕아지고, 동음이의어 구별의 어려움 등 언어생활의 혼란도 발생했다.

1990년대 이후 한자 교육의 필요성이 재론되며 부분적으로 한자 교육이 부활했으나, 이미 단절된 세대를 회복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1978년 4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이 세종문화회관 개관식에 참석한 모습.

◇지방문화 육성의 선구적 정책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정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지방문화에 대한 체계적 지원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대에 수도권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문화적 향유를 지방에서도 실현하려는 노력은 매우 선구적인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문화시설과 예술 활동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고, 지방은 문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1962년 사단법인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창립되고, 1965년 지방문화사업조성법이 시행되어 문화원에 대한 운영비 보조와 시설지원이 이루어졌다. 이 법은 지방문화 진흥을 위한 최초의 법적 기반이었다. 1960년대 이전까지 20개에 불과했던 지방문화원은 1970년에는 124개로 급속히 증가했다. 지방문화원이 전국의 지역별 문화 활동의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방문화원은 지역의 전통문화 발굴과 보존, 문화 행사 개최, 주민 문화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또한, 지방 주민들도 문화적 향유의 기회를 갖게 되면서 수도권과 지방 간의 문화 격차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방문화 육성 정책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전국 230여 개 지방문화원이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반세기를 넘어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의견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문화를 틀 짓고 있는 수많은 문화입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정책들이 1960년대~1970년대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1960년대 구축된 영화산업의 기반은 2000년대 대한민국 영화의 부흥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방송 인프라와 방송문화는 오늘날 K-드라마, K-예능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정책을 재평가하고 재조명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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