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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홍준표의 ‘무너진’ 정치 감각...“공직자 검증도 네거티브? 민주주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최근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나 개인적 감정 표현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정치권이 얼마나 공직자 검증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둔감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홍준표의 ‘무너진’ 정치 감각...“공직자 검증도 네거티브? 민주주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최근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나 개인적 감정 표현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정치권이 얼마나 공직자 검증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둔감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홍준표는 정원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를 둘러싼 폭행 사건 의혹 논란에 대해 “30여 년 전 모호한 사건을 선거 쟁점으로 삼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또 “네거티브 유혹에도 될 사람은 되게 돼 있다”며 정책 대결을 주문했다. 그러나 나는 이 발언을 듣고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네거티브이고, 어디까지가 민주주의적 검증인가.

▲홍준표 전 대구시장.. 뉴시스

민주주의 선거에서 후보자의 과거 행적, 폭력 연루 의혹, 권력 남용 가능성, 도덕성 문제를 검증하는 것은 결코 네거티브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다. 유권자는 단순히 공약집 몇 줄만 보고 투표하는 존재가 아니다. 시민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간성, 권력 행사 방식까지 판단할 권리가 있다.

특히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한 지방행정 책임자가 아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예산과 인사, 도시개발과 교통, 복지와 안전 정책 전체를 좌우하는 사실상의 준국가급 권력이다. 그런 자리에 도전하는 후보라면 수십 년 전 일이라 하더라도 공적 검증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더구나 이번 사안은 단순한 인터넷 괴담 수준도 아니다. 피해 주장과 육성 녹취까지 공개된 상황이다. 물론 최종적 사실관계는 법과 객관적 검증을 통해 가려져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유권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문제 제기와 검증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홍준표는 이를 “네거티브” 프레임으로 덮으려 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위험한 정치적 태도라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 정치에서 “네거티브 하지 말자”는 말은 종종 “검증 자체를 하지 말자”는 논리로 변질돼 왔기 때문이다. 부패 의혹도, 폭력 의혹도, 위선 문제도 선거 때만 되면 “정책 이야기하자”는 말 속에 묻혀버린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검증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맡길 사람의 자격을 확인하는 최소한의 절차다. 공직자의 과거 행적과 도덕성, 권력관을 검증하지 않는 선거는 결국 인기투표와 다를 바 없어지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정책은 결국 사람이 집행한다는 사실이다. 도덕성과 권력관이 무너진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말해도 그 정책이 건강하게 집행될 수는 없다. 정치는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정책만큼이나 사람을 본다. 오히려 사람에 대한 검증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 정책 역시 선전 문구로 전락하기 쉽다.

홍준표는 자신의 이른바 ‘돼지 발정제’ 논란까지 언급하며 과거 자신 역시 정치적 공격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인이 과거 논란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지금 다른 정치인에 대한 검증까지 모두 정치공세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상처받은 정치인의 감정일 수는 있어도 공적 기준은 될 수 없다.

최근 홍준표의 정치 행보도 이런 흐름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과 청와대 오찬 회동을 했고, 김부겸 민주당 대구시장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정원오 논란에 대해서도 사실상 방어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행보만 놓고 보면 때로는 민주당보다 더 강한 어조로 보수 진영을 공격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물론 정치인은 진영을 넘어 특정 사안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이동과 연대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기준의 일관성이다. 과거에는 누구보다 진보 진영의 도덕성과 권력형 의혹 검증에 앞장섰던 정치인이, 이제 와서는 “될 사람은 된다”는 식의 운명론적 정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정치의 본질을 부정하는 일에 가깝다.

선거는 운명 게임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어차피 될 사람은 된다”는 냉소 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검증과 토론, 충돌과 설득을 통해 민심이 움직인다는 전제를 가진 체제다. 오히려 지금 한국 정치의 더 큰 문제는 검증이 지나치게 많아서가 아니라 검증이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내 편이면 모든 의혹이 “정치공작”이 되고, 상대편이면 작은 실수도 “국기문란”이 되는 이중 기준이 반복된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검증 축소가 아니라 검증의 원칙과 일관성 강화다.

나는 홍준표의 발언에서 단순한 현실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피로감과 냉소주의를 본다. 역사 속 정치인들은 종종 말년에 이런 함정에 빠진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보다 강한 신념과 전투성을 보이다가도, 오랜 권력투쟁과 정치적 소모 속에서 점점 “정치는 원래 다 그런 것”이라는 체념으로 이동한다.

조선 후기 붕당정치 역시 처음에는 명분과 공론,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당수 정치인들은 점점 정치 자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결국 세도정치기로 가면서 정치의 기준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권력을 잡는가”로 변질됐다. 공론은 사라지고 권력 유지 논리만 남았다.

홍준표의 발언은 바로 이런 정치적 냉소주의의 전형처럼 보인다. “검증보다 정책 이야기하자.” “네거티브는 소용없다.” “될 사람은 된다.” 표면적으로는 품격과 통합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정치철학 차원에서 보면 이는 민주주의 핵심 요소인 검증정치 자체를 약화시키는 언어다. 더 위험한 것은 ‘자기 진영 해체형 정치인’의 길이다. 역사 속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정치 진영의 이름으로 권력과 명성을 얻은 뒤, 말년에 오히려 그 기반 자체를 허무는 정치인들이 존재했다.

중국 근대사의 왕징웨이는 대표적 사례다. 그는 원래 손문(쑨원)의 측근이자 중국 혁명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장기 권력투쟁 속에서 점점 현실주의와 패배주의로 이동했고, 결국 자신이 평생 외쳤던 정치적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길로 갔다. 한때 혁명의 상징이었던 인물이 말년에 자기 정치철학 자체를 해체해버린 것이다.

물론 홍준표를 왕징웨이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심리의 구조만큼은 닮은 측면이 있다. 특정 진영에서 평생 정치적 자산과 명성을 얻고, 그 진영의 지지로 성장한 정치인이 말년에 들어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기반 자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철학과 기준의 정치인이 아니라 권력의 흐름만 읽는 정치인으로 변질되기 쉽다.

정치인은 진영을 넘어설 자유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이 평생 외쳐온 가치와 기준에 대한 설명 책임은 존재해야 한다. 더욱이 특정 정당의 이름으로 평생 정치적 영향력과 혜택을 누린 정치인이, 70대에 이르러 스스로의 정치적 기반과 가치 자체를 흔드는 듯한 모습으로 비친다면 그것은 결코 건강한 정치적 퇴장이라 보기 어렵다. 그것은 통합의 정치도, 초월의 정치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자기부정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정치는 결국 기준의 문제다. 기준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팬덤과 감정, 그리고 권력만능주의뿐이다. 공직 후보 검증마저 “네거티브”로 몰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급속히 피상화 된다.

나는 이번 홍준표의 발언과 최근 행보가 단순한 실언 차원을 넘어, 오늘날 한국 정치가 얼마나 깊은 도덕 기준 피로감과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고 본다. 공직 후보 검증은 네거티브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

필자

/

김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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