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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목소리가 있는 문장

이제 누구나 AI의 도움을 받아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글에 담긴 목소리다. 너무나 완벽한 문장이지만, 읽다 보면 묘한 공허함이 느껴지는 글이...

[혜윰노트] 목소리가 있는 문장
신유진 작가·번역가
글 속에는 목소리가 있다
완벽하나 공허한 글 말고
교감을 만들어내는 삶의 글

인지과학자들은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내적 언어’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단어를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문장을 소리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어떤 글은 정말로 눈이 아니라 귀로 읽는 기분이 든다. 죽은 글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어릴 때, 엄마가 좋아하던 시인이 있었다. 그 시인의 시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막걸리’였다. 막걸리가 시가 되다니. 나는 조금 더 아름답거나 의미심장한 단어를 기대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 시인의 인터뷰를 읽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치아가 상한 그에게 막걸리는 밥이었고, 몸이 불편해졌지만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로 그의 시를 읽으면 아이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막걸리’가 그렇게 어여쁘고 애틋한 말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글 속에는 말을 건네는 ‘화자’가 있다. 우리는 흔히 글을 읽을 때 작가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우리가 듣는 것은 글 속에서 말을 건네는 목소리, 바로 화자다. 같은 이야기도 누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태도로 말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친구 혹은 선생처럼 말을 건네는 글을 만나면, 독자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 목소리를 듣는다.

문학 작품 몇 편을 번역하면서 나는 글에 담긴 목소리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 번역가는 흔히 단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문학 번역은 목소리를 옮기는 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단어는 사전에서 찾을 수 있지만 문장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화자의 태도와 거리에서 드러난다. 같은 사물을 말할 때도 누군가는 담담하게 전하고, 누군가는 감정을 이입해서 이야기하지 않던가. 그 미묘한 온도 차이가 문장의 목소리를 만든다.

어찌 보면 목소리는 문체와 비슷해 보인다. 문장의 호흡과 단어의 선택, 리듬에 따라 얼마든지 변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체가 어떻게 말하느냐를 가리킨다면, ‘목소리’는 누가 말하느냐를 드러낸다. 사실을 전하는 사람,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사람, 가까이 다가가 말하는 사람. 글 속에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문장 뒤에 온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글은 독자에게 특별한 교감의 순간을 만들어준다.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글이 쏟아지는 시대다. 이제 누구나 AI의 도움을 받아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글에 담긴 목소리다. 너무나 완벽한 문장이지만, 읽다 보면 묘한 공허함이 느껴지는 글이 있다. 발음이 정확하고 속도가 일정한 기계음이 말하는 것 같은 글. 그런 글은 정보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독자와의 교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쓰는 사람의 목소리는 수려한 문장력이나 논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서 있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모험을 쓰는 작가가 있다고 하자. 그가 쓰는 모험은 거대한 함성이 아니라 작은 속삭임에서 시작될 것이다. 큰 문이 아니라 작은 통로에서 출발할 것이다. 작가의 목소리는 결국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그것을 지키는 것. 더 매끄럽고 수려한 문장의 유혹으로부터, 동경과 흉내 내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누구보다 먼저 나를 의심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목소리가 있는 글은 독자를 삶의 자리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말을 되찾는다. 읽는 사람의 목소리다. 작가에게서 시작된 한 편의 글은 그렇게 다른 삶으로 건너가 또 다른 목소리를 불러낸다.

신유진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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