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다해 소멸한 물질
무한한 가능성의 메시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힘
이배 작가의 숯 앞에서는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최영은 기자
이배 작가의 숯 앞에서는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까만 덩어리들은 전시장의 들뜬 공기와 미세한 빛마저 빨아들이며 절대적 고요를 만들어낸다. 이 침묵은 모든 것이 끝나버린 텅 빈 적막이 아니다. 활시위를 끝까지 당겼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무엇으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응축된 에너지가 발산하는 팽팽한 텐션, 가능태(可能態)의 상태다.
압도적인 긴장감은 숯이 품고 있는 역설적 시간에서 비롯된다. 섭씨 1000도를 웃도는 캄캄한 가마 속에서 나무는 제 형태를 허물며 맹렬히 타들어 간다. 극한의 열기와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뼈대만 남긴 순수한 질료는 죽음과 소멸의 잔해가 아니다. 불씨만 닿으면 언제든 다시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 생명력을 잉태한 가능태의 물질이 숯이다.
뮤지엄 SAN의 정갈한 공간 속에 놓인 거대한 숯들은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뿜어낸다. 모든 겉치레가 타버린 뒤에 남는 가장 단단한 본질은 무엇인가. 이배 작가가 숯이라는 물질을 통해 증명해 내는 소멸과 생성의 미학이 이 지점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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