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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마당] 늑구가 남긴 것들

SNS를 달군 정교한 목격 사진 중 일부는 AI가 만든 허상이었고, 그 탓에 불필요한 행정력이 낭비되기도 했다. 늑구의 야성이 울타리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야생성이 거세된 동물원의 사육 환경이 한계에...

[한마당] 늑구가 남긴 것들

한승주 논설위원

해질녘 저 멀리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프랑스인들은 이를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렀다. 늑대는 오랫동안 우리가 경계 밖으로 몰아낸 공포의 상징이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말 역시 거짓 정보가 반복돼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도 믿지 않게 된 상황을 뜻한다. 하지만 2026년 봄, 대전 도심을 탈출했던 늑대 ‘늑구’는 이 고전적 정의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아홉 번째로 태어나 ‘구(九)’를 달았다는 늑구의 탈출 소식에 사람들은 공포보다 걱정을 앞세웠다. 그가 자취를 감춘 9일 동안 온라인을 뒤덮은 것은 사살이 아니라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늑구가 돌아오자마자 연고지 팀인 한화 이글스가 연패를 끊어내며 그는 단숨에 ‘승리 요정’이 됐고, 유명 빵집에선 ‘늑구빵’까지 등장했다. 답답한 일상에 갇힌 사람들은 탈출한 늑대를 보며, 어쩌면 자신을 대신해 경계를 넘어준 존재를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맹수 탈출이라는 아찔한 위기가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놀이’가 된 풍경은 외신의 눈에도 이례적이었다. BBC는 늑구를 ‘결코 갇혀 있으려 하지 않는 자유의 상징’이라 소개했고, 로이터와 CNN은 한국의 독특한 밈(Meme) 문화와 팬덤 현상을 집중 조명했다. 대전시장이 직접 캐릭터화를 지시할 만큼 이 사건은 도시의 표정을 바꾸는 서사가 됐다. 빵지순례에 더해 ‘늑구 관람’이 대전 여행의 필수 코스로 거론될 정도다.

하지만 열광의 이면에는 씁쓸한 자화상도 공존한다. SNS를 달군 정교한 목격 사진 중 일부는 AI가 만든 허상이었고, 그 탓에 불필요한 행정력이 낭비되기도 했다. 늑구의 야성이 울타리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야생성이 거세된 동물원의 사육 환경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시사한다. 늑구는 다시 우리 안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판 굴은 우리 사회에 작지 않은 구멍을 냈다. 우리가 진정 그리워한 것은 늑구였을까, 아니면 억눌린 채 잊고 살았던 우리 안의 야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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