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협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상협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전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소장)
전통적 안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과거의 안보가 총·칼로부터 영토를 지키는 ‘공간적 방어’에 머물렀다면, 오늘날 복잡한 국제 환경에서 탄생한 경제 안보는 국가라는 유기체가 스스로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의 지속’을 확보하는 전쟁이다. 남의 도움 없이도, 혹은 외부의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안보의 완성이다. 이 거대한 전환기에 대한민국은 세계의 ‘두뇌’를 상징하는 반도체를 넘어, 세계의 ‘혈관’인 전력망을 장악하는 ‘주인공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반도체, 세계의 두뇌를 선점하다
우리는 이미 반도체라는 필살기를 통해 세계의 ‘두뇌’를 일정 부분 장악했다.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대전환 시대에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 부품이 아니라 국가의 지능과 국방력을 결정짓는 핵심 자산이다. 대한민국이 반도체 패권 다툼의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세계의 지능을 처리하는 ‘중추신경’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지능을 가진 유기체라도 그 지능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멈출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두뇌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의 통제권’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HVDC, 경제 영토를 넓히는 대동맥
여기서 우리는 ‘제2의 반도체’로 전력망 기술, 특히 초고압 직류송전(HVDC)에 주목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증가와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 전환은 전 세계적인 ‘전력 쟁탈전’을 촉발했다. HVDC는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며 장거리로 전력을 보내는 ‘에너지 대동맥’이다. 우리가 이 기술을 필살기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전력망은 한 번 구축하면 수십 년간 교체가 어려운 국가 기간 시설이다. 특히 최근 핵심 부품의 국산화율을 비약적으로 높이며 확보한 독자적인 전력 기술로 세계에 에너지 혈관을 깔아준다는 것은, 해당 국가의 에너지 운영 표준 자체를 대한민국과 동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제품 수출을 넘어 우리의 ‘경제적 영토’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아세안: 공간 확보 전략의 핵심 요충지
대한민국 경제 안보의 공간적 확장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타겟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주인공은 아세안(ASEAN) 10개국이다. 아세안은 현재 각국의 전력망을 하나로 묶는 ‘아세안 전력망(APG)’ 통합을 꿈꾸고 있지만, 기술 표준의 파편화와 인프라 노후화라는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때 우리가 가진 HVDC 기술과 지능형 전력 관리 시스템을 이식한다면, 아세안 전체의 에너지 흐름을 관리하는 ‘에너지 운영체제(OS)’를 대한민국이 선점하게 된다. 이는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일본이나 중국의 영향력을 압도하고 우리 기업들의 활동 공간을 보장하는 거대한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길이다.
◆‘K-시스템’으로 만드는 전략적 자율성
물론 냉정하게 보아 대한민국의 기후 기술 수준은 최고국 대비 약 85% 선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기초 기술의 격차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가진 세계 정상급의 ‘IT 융합 전력망 운영 능력’과 ‘독보적인 인프라 구축 속도’를 결합한 시스템 브랜드로 승부해야 한다. 일본이 ‘Made in Japan’이라는 브랜드 신뢰를 바탕으로, 비산유국임에도 베트남에 원유를 공급하며 희토류 자원을 확보하는 치밀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듯, 우리는 전력망과 AI를 결합한 ‘지능형 K-그리드’를 브랜드화해야 한다. 단순히 부품이나 제품을 파는 것을 넘어, 한 국가의 에너지 안보를 설계하고 책임지는‘Made in KOREA, 토탈 솔루션’을 제공함으로써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두뇌와 혈관을 관리하는 주인공이 되라
반도체로 세계의 ‘두뇌’를 잡았다면, 이제는 HVDC와 전력망 기술로 세계의 ‘에너지 혈관’을 장악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차세대 경제 안보 핵심 전략이다. 세계의 두뇌와 혈관을 동시에 관리하는 주인공이 될 때, 대한민국은 그 어떤 지정학적 파고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깃발을 꽂는 영토 확장을 넘어, 우리 시스템이 흐르는 ‘연결의 영토’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경제 안보의 완성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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