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 현장에서 효율성을 무기로 도입된 조합원 전용 애플리케이션(앱)이 최근 시스템 오류와 법적 공방에 휘말리며 조합 내 갈등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디지털화 장려 흐름 속에서 투명성 제고를 기대했던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플랫폼이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22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현재 전자투표 시장은 레디포스트의 '총회원스탑', 이제이엠컴퍼니의 '우리가', 한국프롭테크의 '얼마집' 등 주요 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다. 다만 이들의 운영 행태를 상시 감시할 주체와 제재 규정이 미비해 조합원 피해 우려가 제기되는 양상이다.
특히 급격한 시장 확대 과정에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일부 사설 플랫폼이나 초기 프로그램의 경우 구조적 결함으로 인한 불공정 시비가 잇따르고 있다. 투표가 완전히 마감되기 전에는 집계 결과가 철저히 차단되어야 하지만, 일부 시스템의 관리자 페이지에서 실시간 투표율과 동·호수별 참여 현황, 중간 찬반 추이가 노출되는 취약점이 지적되며 특정 계파의 선거 개입 논란으로 번지는 실정이다.
재산권이 걸린 민감한 의결 과정인 만큼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지만, 해킹 우려나 데이터 위변조를 막을 명확한 장치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로 인해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전자투표 자체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적 지위를 둘러싼 혼선은 사업 자체를 흔드는 요인이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으로 전자적 의결 방식의 근거는 마련됐으나, 플랫폼 운영사들이 정비사업전문관리업('정비업') 면허 없이 총회 깊숙이 관여할 경우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지난해 6월 서울동부지방법원은 정비업 등록 없이 서면결의서 징구 시스템을 지원하고 홍보 및 텔레마케팅 인력을 제공해 총회 전반을 대행한 사설 업체와 대표이사에게 도시정비법 위반죄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정비업계 한 관계자는 "무등록 플랫폼 서비스를 이용한 조합들은 투표 효력 자체가 무효화될 수 있다"며 "수천억원 규모의 계약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시장을 주도하는 업체들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ICT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를 취득했으나, 실제 조합 총회 운영의 적법성을 관리할 국토교통부나 지자체와의 일원화된 감독 창구가 없어 입법 공백이 지속되는 실정이다.
플랫폼 업체의 불명확한 선정 기준과 계약 구조도 도마 위에 올랐다. 도시정비법상 예산 외 조합원 부담이 되는 계약은 총회 의결과 경쟁입찰을 거쳐야 하지만, 일부 조합 집행부는 소액 수의계약 제도를 악용해 대의원회 등 형식적 절차만 거쳐 집행부 입맛에 맞는 업체를 임의로 선정하는 편법을 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수수료 구조나 계약 조건을 알지 못한 채 특정 앱 설치를 사실상 강제받아 개인정보 침해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앱 내 커뮤니티 운영 과정에서 소수 의견이나 조합 집행부에 비판적인 게시글을 임의로 차단·검열한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최근 수도권 한 정비사업 현장에서는 특정 앱을 통한 전자투표 과정에서 공정성 시비가 일어 업체가 계약 해지를 예고하고 주민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해당 지역의 한 조합원은 "조합 내에서도 비대위니 대표단이니 하면서 엄청 시끄러웠다"라며 "집행부도 비대위도 각각 투표를 올리니 어디에 투표를 해야하는지도 혼란스러웠다"고 밝혔다. 의사결정을 통합하겠다며 도입한 전자투표 플랫폼이 도리어 계파 갈등의 도구로 전락해 조합원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 다른 수도권 정비사업 지역의 조합원은 "신탁사와 사업을 진행하면, 신탁사가 처음부터 자기들과 많이 사업을 진행해 온 업체에 대해 소개를 더 적극적으로 한다"라며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신탁사가 믿는 업체라니 자연스레 더 관심이 가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정보기술(IT) 취약 계층인 고령 조합원의 정보 소외와 대리 투표 위험성도 해결되지 않았다. 본인 인증 절차가 복잡해 투표를 포기하려는 고령 소유주가 많은 재개발 구역의 특성상, 외부인이 고령층의 기기를 조작해 의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일부 현장에서는 홍보 요원이 고령층의 휴대전화 인증을 대신해 주며 임의 투표를 유도했다는 의혹을 두고 조합원 간의 법적 고발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대면 투표의 특성상 화면 너머에서 실제 소유주가 투표권을 행사했는지 기술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구조적 맹점이 지적된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전자투표의 편리함만 쫓다가 법적 소송에 휘말려 사업이 정체되는 부작용도 많다"며 "고령층이 많은 정비사업 특성상 디지털 소외를 막을 보조 장치와 철저한 법적 검증이 선행되지 않으면 도리어 재산권 침해라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 청년일보=김재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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