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즈포럼
김미소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전문관
2024년 방영되며 큰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정년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황폐한 시절 속에 꽃핀 ‘여성국극단’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여성국극인들이 자신의 재능과 예술을 통해 삶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극에 필요한 남성 역할까지 여성 배우들이 직접 소화하며 무대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은 작품의 인상적인 특징으로 꼽혔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인도네시아 자바의 한 왕궁에서도 <정년이>를 떠올리게 하는 흥미로운 예술적 실험이 펼쳐졌다. 202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자바 무용 아카이브: 망쿠느가란 무용 예술, 1861–1944」이다. 망쿠느가란은 1757년 수라카르타 지역을 중심으로 수립된 공국이다. 이 공국은 자체 군사부대를 보유할 정도로 자치권을 누렸으며, 예술에 대한 후원으로 자바 특유의 궁중문화를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망쿠느가라 4세(재위 1853~1881) 시기에는 춤과 노래, 극이 결합된 자바식 무용극 ‘랑엔드리얀’이 망쿠느가란 특유의 공연 양식으로 발전했다. 이 공연의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배역을 여성들이 맡았다는 점이다. 여성 배우들은 여성 인물뿐 아니라 왕과 장군 같은 남성 인물까지 춤과 노래로 표현했다. 다른 자바 궁정에 비해 여성들이 군인·행정가·예술가 등 비교적 다양한 역할을 맡았던 망쿠느가란의 사회적 환경 역시 이러한 공연문화가 자리 잡는 배경이 되었다.
이후 망쿠느가라 5세와 6세 시기에는 여성 무용수의 활동 영역이 더욱 넓어지고 복식과 극적 요소도 다양해졌다. 궁중의 전유물에 가까웠던 공연도 점차 일반 관객에게 공개되었다. 무대 위 여성들은 전투를 표현하는 춤에서 무사의 모습을 연기하기도 했고, 랑엔드리얀에서는 남성 배역까지 맡으며 당시 궁중 공연에서 통상적으로 구분되던 성별 역할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이 공연들이 기록으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무용은 공연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는 예술이다. 그러나 망쿠느가란은 1861년부터 1944년까지 그 순간들을 글과 사진으로 붙잡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1,595장의 문서와 640장의 사진에는 50종의 전통무용을 비롯해 안무, 반주 음악, 무용의 규칙과 철학, 동작과 공연의 변화 과정이 담겨 있다. 덕분에 160년 전의 공연예술은 소멸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자바의 춤과 가믈란, 와양 등 전통공연예술을 전승하고 연구할 수 있는 살아있는 자료가 되었다.
드라마 <정년이>가 한때 잊혔던 여성국극을 다시 우리 앞에 불러냈다면, 망쿠느가란의 기록은 사라졌을지도 모를 인도네시아의 전통춤과 음악을 우리 앞에 다시 불러냈다. 기록유산의 가치는 오래된 문서를 보존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그 기록을 통해 움직임을 되살리고, 한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꿈꾸고 표현했는지를 미래 세대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세계기록유산이 모두의 기억으로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다.
김미소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전문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