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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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아 | 서울대 명예교수(사회이론·젠더법학)
사회학의 대가 막스 베버(1864~1920)를 강의할 때마다 구한말에 태어나 식민지 시대를 겪고 현대 한국을 살다 간 유학자 취주(翠洲) 신언직(1884~1961) 선생을 떠올리곤 한다. 두 사람의 시대가 중첩될 뿐만 아니라, 취주 선생의 방대하고 독특한 학문 세계와 사상가로서의 면모에서 베버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경북 봉화 출신인 신언직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 봉화와 영남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신태운 선생의 아들이자 대유학자 정산(貞山) 김동진 선생의 제자다. 그는 1906년경 신학문 서적을 접한 뒤 특히 서구 자연과학에 심취하였다. 중국 계몽사상가 양계초(량치차오·1873~1929)의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을 읽고는 “가슴이 열리고 안목이 확 트이는 충격”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 기우는 가세와 노모의 병환으로 봉화에 머물면서 독학으로 일어와 영어 등 외국어를 습득하여 서양의 역사, 지리, 천문, 철학, 종교, 수학 등을 두루 익혔다고 한다. 유학과 서구 학문을 섭렵하고 모두 사랑했던 취주 선생은 오늘의 한국인과 연구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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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주 선생은 저술에 비상한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73살에 이르기까지 17종 63책과 여타 저술들을 남겼다. 이들 중 절반 정도의 주요 저술을 후손들이 ‘취주전서’로 엮어 1988년 영인본으로 출간하였다. 거친 황무지와 같았을 시대에 세계를 마주하였던 구한말의 학자를 되살리고자 오늘은 취주 선생의 업적을 되새겨본다.
첫째, 그의 유교에 대한 인식과 믿음에 관해서다. 그는 선진유학에 대한 천착과 고증학적 연구 방법으로 유학을 학문의 반석으로 삼았다. 평생을 구인명리(求仁明理)를 추구하였는데, ‘구인’이란 측은지심과 자비로 만물에 사랑을 베풀고 만민 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명리’란 자연과학을 기초로 대우주에 통합되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삼는 것이라 한다. 1920년 경기도 시흥에 소재했던 녹동서원에서 책임자인 원주(院主)로 있을 때도 유교 부흥 운동에 진력하였고, 유교 경전의 외국어 번역 사업과 함께 천주교·기독교·회교·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렇게 그의 유교관은 매우 개방적이고 유연한 것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르침은 모두 유교”라는 보편적 인간학으로서의 유학을 지향했다. 이런 유교 인식은 반상·남녀·적서 등을 서열화하고 차별하는 유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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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서양 학문에 대한 주체적 수용과 활용에 대해서다.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만국의 서적을 종람하게 되었는데 비로소 세계가 허대인(許大人)과 같고 지식은 허진(許眞)과 같은 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이 옛날에 본 것은 단지 초파리나 흙벌레일 뿐이다. (중략) 반드시 문호를 타파할 계책을 내어서 공자의 대동(大同)의 뜻을 밝혀 동양과 서양을 평등하게 보아야 하고 신구의 학문을 절충한 후에야 가할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서구의 과학과 수학뿐 아니라 정치·경제·지리·종교 등의 학습을 권했다. 서양 학문에 대한 그의 태도는 환경·생태에 대한 관심에서도 잘 드러난다. 취주 선생은 호방하게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광학기구를 사용해 태양의 자연광선을 주간 지대에서 야간 지대로 차례차례 전달해 밤을 물리치는 방책이라며 ‘배야책’(排夜策)을 제안하였다. 포르투갈(이베리아) 반도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한반도까지 이르는 커다란 거울들과 태양 빛을 활용하여 야간조명으로 사용한다는 것인데, 그는 여기서 앞으로 닥칠 공해 문제까지 염두에 두었다 한다. 이 대책은 과학적으로 여러 오류를 가지고 있지만 봉화의 한 유학자로서 실로 경이로운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신언직이 꿈꾸었던 태양광 활용의 영감을 오늘에 계승하여 태양을 에너지원으로 적극 활용한다면 더없이 좋지 않을까. 또한 여기서 그의 근대 학문에 대한 태도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현재 내가 놓인 위치에서 서양 학문과 이론을 수용하는 주체적 방법’이라고 이해한다.
나아가, 취주 선생은 그의 우주관과 철학을 ‘아체(我體) 철학’으로 통섭하였다. 이는 그가 만년에 도달한 달관의 경지로 하나의 종합적인 지혜, 즉 온전한 철학 체계를 완성코자 한 것이다. 이 글을 빚진
한국유학사 연구자 이영춘 선생은 취주전서의 ‘아체음’(我體吟)을 자연과 사회를 노래한 “충실한 세계문화사 혹은 세계인문지리서”라고 평한다. 여기서는 중국, 만주에서 동남아 제국과 인도, 유럽과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대륙 등을 노래하다가 다시 지구와 은하계로 그 시야를 넓히고 있다. 취주 선생은 “대우주는 상재(上宰)에 의해 통솔되는데, 상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곧 나의 마음인 까닭에 나의 마음이 곧 대우주를 포함하며 내 몸을 형성한다”며, 이를 깨닫고 수련하여 “우주 간에 완전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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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료 보존과 계승의 문제를 지적하려 한다. 앞에서 베버를 언급했지만 아쉽게도 신언직 저술의 보존과 연구는 미진하다. 이 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관련 부분과 이영춘 선생의 논문 ‘전통유학과 근대 학문 간의 조화 사례―신언직의 취주전서를 중심으로’에 의거하고 있어서 그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실은 신언직 선생은 필자의 어머니의 아버지이시다. 언젠가 외가에서 보관하던 (외)조부의 서적 대다수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깊은 안타까움과 분노마저 느꼈다. 이렇게 귀중한 기록물은 공적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필자가 전통, 식민지성과 젠더 관계를 축으로 한국가족법에 관한 박사논문을 쓸 당시 나도 모르게 조부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얼어붙은 식민지적 “전통문제”를 붙들고서, 현재에 부합하도록 여성주의적으로 재창조하고자 했던 나의 문제의식에 조부의 확 트인 유학론이 더해졌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평생을 초야에 묻혀 외골수로 매진하셨을 그의 학문이 오늘날 거의 전수되지 못한 것은 크나큰 상실이다. 어쩌면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성의 조화를 고민하던 뛰어난 조선 학자들의 유산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현재의 사회과학과 철학에 통합시키지 못한 채 그들을 떠돌게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불초 후손이 할아버지를 알리고 기억하고자 조그만 글을 기록해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양현아 공방’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양현아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법대 최초 여성 교수로 임용되어 젠더, 법학, 사회이론, 식민주의, 전통문제, 재생산권, 일본군 성노예제, 증언 등에 관한 학제적 강의를 하다 정년퇴임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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