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 속 현장 행보…위기일수록 먼저 움직인 ‘선점 경영’
1998년 취임 후 28년, 딥체인지로 사업 구조 근본 전환
하이닉스 인수·HBM 집념…AI 시대 ‘판 바꾼 선택’
리밸런싱 통해 재도약 준비…AI 인프라 중심 재편 가속
최태원 SK그룹 회장(오른쪽)의 손목 깁스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기념 촬영을하고 있다. 사진=최태원 SK그룹 회장 인스타그램 캡처
[편집자주] 1998년 최종현 선대회장의 별세로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SK의 수장이 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취임 28년차를 맞았다. 내수 중심의 선경을 수출 대기업 SK로 변모시킨 최 회장은 이제 석유와 통신이라는 과거의 유산을 넘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전방위 인공지능(AI) 생태계를 구축하며 SK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SK 창립 100년을 향한 최 회장의 미래 빅피처와 승부사적 면모를 집중 조명한다.
매일일보 = 안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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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를 치다 손목 뼈에 금이 가는 부상에도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현장 경영은 멈추지 않았다. 최 회장은 지난 1월 말 부상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날아가 실리콘밸리와 시애틀을 오가며 글로벌 기업인들과 연이어 만났다.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SK의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현장 경영의 일환이었다.
최 회장의 깁스 위에는 젠슨 황(엔비디아), 마크 저커버그(메타), 순다르 피차이(구글), 손정의(소프트뱅크그룹) 등 글로벌 기업 수장들의 서명이 빼곡히 남았다. '최태원식 현장 리더십'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난달 열린 GTC 2026 현장에서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젠슨 황은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 협력 제품인 ‘베라 루빈’에 “JENSEN ♡ SK HYNIX”라는 사인을 남기며 친밀함을 표시했다. 또 황 CEO의 딸 매디슨 황이 먼저 최 회장을 찾고 엔비디아 2인자로 불리는 제프 피셔 수석부사장도 직접 인사를 건네는 등 자연스러운 교류가 이어졌다. 최 회장 역시 스스럼없는 소통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확인했다.
현장 중심의 리더십은 최태원 시대 28년을 관통해온 경영 스타일이다. 특히 AI 인프라 주도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총수가 직접 현장을 뛰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의사결정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은 SK 경쟁력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 회장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38세의 나이로 그룹을 맡았다. 당시 SK는 에너지와 통신 중심의 내수 기업이었다. 취임과 동시에 ‘딥체인지(Deep Change)’를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이후 SK는 해외 시장 개척과 수출 확대를 통해 내수 중심 구조를 탈피했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에너지·통신 중심 구조에서 반도체·배터리·바이오로 축을 옮긴 것은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돈 버는 방식’을 바꾸는 전략적 전환이었다.
SK하이닉스 고대역폭메모리(HBM)4의 16단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모형 전시물. 사진=SK하이닉스 제공
◆하이닉스 인수에 젠슨 황 인연까지…AI 판 바꾼 연결
SK의 결정적 순간마다 최 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이 작용했다. 2012년 SK하이닉스 인수는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업황 변동성이 큰 반도체 산업에 그룹의 명운을 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지만 최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선택은 SK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중심으로 AI 시대 핵심 기업으로 부상했다. 한때 ‘2등 기업’으로 불리던 메모리 업체가 AI 시스템의 병목을 해결하는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젠슨 황과의 인연도 결정적인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2021년 엔비디아 본사에서 처음 만나 AI 전환의 방향성을 공유했고 이후 협력 관계를 빠르게 구축했다. 이는 SK하이닉스가 AI 가속기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의 핵심 HBM 공급사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이뤄진 이른바 ‘치맥 회동’도 이같은 최 회장의 리더십 연장선이다. AI 반도체 시장이 HBM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점에서 이 만남은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공급망과 기술 동맹을 조율하는 전략적 접점으로 해석된다.
◆리밸런싱으로 다음 판 짠다…AI 인프라로 확장
AI 시대 주도권을 선점한 최 회장은 이제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핵심 키워드는 ‘리밸런싱’이다. 비핵심 자산을 정리하고 투자 우선순위를 재배치해 미래 사업에 집중하는 전략이다.
실제 SK는 최근 2년간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 체력을 개선했다. 순차입금은 8조원대로 낮아졌고 부채비율도 하락했다. 종속회사 수도 2024년 말 약 200개에서 지난해 말 173개로 줄이며 관리 효율성을 높였다.
이와 함께 SK는 AI 중심 사업 재편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미국에 약 100억달러 규모의 AI 투자 법인을 설립해 글로벌 AI 기업 투자와 데이터센터, AI 시스템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단순히 반도체 기업 하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룹 전체를 AI 인프라 중심으로 재편하는 전략이다.
최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도 “AI 시대는 이제 시작 단계이며 앞으로의 시장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고 강조했다. 하이닉스로 ‘길목’을 잡았다면 이제는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그의 역할은 그룹 내부를 넘어선다. 재계 맏형인 최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경제 현안에 목소리를 내며 재계를 대표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민간 경제외교를 통해 한국 기업의 역할을 설명하는 등 존재감도 확대되고 있다.
결국 최태원 시대 28년은 ‘현장을 선점하고, 타이밍을 잡고, 구조를 바꿔온 시간’으로 요약된다. 내수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전통 산업에서 첨단 산업으로 SK의 좌표를 이동시킨 과정이었다. 깁스를 한 채 현장을 누비는 모습은 그 연장선에 있다. 위기 때마다 직접 움직이며 판을 바꿔온 경영 방식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의 현장 중심 경영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SK가 위기 때마다 방향을 잡아온 핵심 방식”이라며 “결국 사람과 현장에서 답을 찾는 구조가 지금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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