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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천원의 굴욕? 알고 보면 큰 역사

(사진) 대구 조선은행 엽서 : 출처 네이버 블로그(역사, My Identity) 이황의 후손은 조선은행 폭파 배후 후손 중에는 다소 과격(?)하신 분도 계셨다. 이황의 14대손 이름은 이원록. 그는 감옥을 17번 다녀왔고 중국 베이징...

천원의 굴욕? 알고 보면 큰 역사

[화폐와 역사 이야기]

(15) 싼 천원 비싼 사연

- 박성영 역사문화해설사

위조할 가치가 없는 천원

1972년 이후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만 원권은 6회, 오천 원권은 5회, 천 원권은 3회 그 모양과 디자인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 원권의 디자인 변경 횟수가 다른 지폐에 비해 너무 적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용 빈도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시중에 유통되는 지폐가 많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치가 작아 위조지폐를 만들어도 가성비가 떨어져 기피 대상이다. 쉽게 말해 천 원을 제작하는 비용이 천 원 든다면 어느 누가 위조를 하겠는가?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말이다.

참고로 위조지폐 만들다 걸리면 최고 무기징역에서 2년 이상의 처벌을 받는다.

(사진) 현행권 위조지폐 발견 현황

최근에는 붕어빵 한 개가 천 원으로 가치가 많이 하락한 수준이고, 그나마도 계좌이체를 하거나 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 보니 천 원은 예전의 유통량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진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천 원에 무슨 그림이 있는지, 어떤 내용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몇몇 어르신들은 천 원권이 보라색(분홍색)이라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오랜 시간 동안 보라색이었고 이황 선생님이 파란 지폐 위에 보라색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혼동하실 수도 있겠다 싶다.

(사진) 3차 천원권 앞면 명륜당(강조)과 이황의 색상

열심히 공부해!! 말씀하시는 듯

그런 어르신들은 아직도 천 원에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나?” 하시는 분도 있는데, 1차, 2차에만 있었고 지금 쓰는 3차 천 원 앞면에는 성균관대학교 안에 명륜당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치를 밝힌다’ 하여 명륜당인데,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에도 명륜당이 존재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향교가 있는 동네를 교동(校洞) 또는 명륜동이라 불렀고, 우리 인천에는 관교동(官校洞)이라 부르는 지명이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어 함께 붙여진 이름이다. 다만 강화도 교동도의 교동(喬桐)은 다른 뜻으로 먼저 교동을 사용하다가 향교가 들어와 오해하기 쉽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입구 우측에 명륜당이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주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시선을 다 가져갈 만큼 압도된다. 얼마나 큰지 마당이 작아 보이는 착시도 생긴다.

(사진) 성균관 명륜당과 감당나무(팥배나무)

천 원권 그림과는 다르게 명륜당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우측이 아닌 좌측으로 감당나무(팥배나무)가 있어 화폐와 다소 차이가 있다. 실제로 보면 팥배나무인지 매화나무인지는 알 수 없고 꽃마저도 비슷해 전문가가 아닌 이상은 구별이 쉽지 않다.

조용한 바람 소리와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푸근한 느낌을 주고 가로로 길게 늘어선 한옥이 나를 감싸주는 편안함이 아주 좋았던 장소였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조선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명륜당이 천 원에 그려진 건 퇴계 이황 선생님이 성균관대학교의 학장인 대제학을 역임한 것도 연결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이황 선생님의 집터인 서소문동(한국산업은행 본점 건너)에 표지석만이 남아 있고, 반면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남산도서관 아래 입구 오른쪽에는 선생님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선생님은 도서관 출입자들을 지켜보시며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를 하고 계셨다.

(사진) 남산도서관 버스정류장과 이황 선생님

우연히도 반대편인 왼쪽 버스정류장 뒤에는 천 원권 모델이 될 뻔하셨던 정약용 선생님이 100m도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계셨다. 두 분은 쌍둥이처럼 자리 잡았지만 약간의 풍수지리가 천 원의 모델이 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였나 보다. 그렇게 남산도서관 입구에는 공부의 천재들이 입구를 지키고 계셨다.

퇴계 이황 vs 율곡 이이

천 원에서 쓰고 계신 것은 ‘복건’이라는 전통 모자이다. 흔히 돌잔치 할 때 어린이가 쓰거나 드라마에 조선 시대 악동들이 꼭 쓰고 나오던 인식이 있어 좋지 않아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틀린 건 아니다. 한때 유학자들이 착용하던 모자는 분명하다.

사진 속 동상이 쓰고 있는 ‘정자관’은 관직에서 물러난 유학자들이 평상시 쓰는 모자라 좀 더 합당하다 하겠다. 하지만 오천 원권이 먼저 나와 이이 선생님이 먼저 선점을 하셨으니 ‘양보하셨다’ 하고 이해하는 게 좋겠다.

유학을 배우는 학자들은 자기의 스승이 옳다고 학문적으로 싸웠다. 이황의 제자들은 [이기이원론]을, 이이의 제자들은 [이기일원론]이 옳다는 주장이다. 싸움은 현대에서도 벌어졌다.

이이(덕수 이씨)가 첫 오천 원권(1972년) 모델로 낙점이 되었을 때 천 원은 없었다. 처음 천 원이 나온 건 1975년인데 이황(진성 이씨)을 모델로 하게 됐다. 여기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이황 선생님은 이이 선생님보다 35살이나 나이가 많고 학문적으로도 선배인데 액면가가 1/5 수준인 천 원에 들어가야 하느냐?”는 불만이었다.

명종 13년(1558년), 수능의 황제 율곡 이이는 별시(과거 시험)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대석학을 뵙고 싶어 안동 도산에 들렀다. 당연히 성균관 유학자라면 대학교 총장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천 원권 모델과 오천 원권 모델의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되었다. 위인은 위인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두 위대한 스승은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했다.

(사진) 대구 조선은행 엽서 : 출처 네이버 블로그(역사, My Identity)

이황의 후손은 조선은행 폭파 배후

후손 중에는 다소 과격(?)하신 분도 계셨다. 이황의 14대손 이름은 이원록. 그는 감옥을 17번 다녀왔고 중국 베이징 감옥에서 1944년에 생을 마쳤다.

이 정도 전력을 가지고 계신 분! 이육사.

1927년 대구 조선은행 폭파 사건의 배후로 지목이 되었지만 실제 배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일로 대구 형무소에 다녀오셨고 이후에 이육사라고 개명하신다. 이황의 후손이라 그런 것일까? 이육사 선생님은 시인이고 문장가였다. 이황 선생님은 화폐에, 그의 후손 이육사는 은행과 관련된 사건으로 연결된 것도 참 화폐 역사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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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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