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 3대 대통령보다 독립선언문 저자로 불리길 원해
반 고흐, 편지글 없었으면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랐을까
‘폭싹 속았수다’ 오애순, 시집 내면서 삶이 곱게 물들어
저술은 황홀한 경험…플로어에서 스테이지로 시선 이동
묘비명으로 유명한 이가 여럿 있지만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을 기억할 만하다. 그가 스스로 정리한 업적은 이렇다.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American Independence of the Statute of Virginia for religious freedom and Fath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미국의 3대 대통령을 지낸 이력은 쏙 빼고 독립선언문의 저자라는 사실을 맨 앞에 뒀다.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직보다 저술의 가치를 귀하게 여겼다.
독립선언문의 힘은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데 있다. 영국의 폭정을 나열해 분노를 불러일으키고는 그것을 근사한 글에 담아 행동을 촉발시켰다. 가령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믿는다(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라는 문장은 독립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생각한다’ ‘주장한다’는 식의 표현과는 급이 다르다.
선언문의 마지막은 혈서 마냥 비장하다. ‘생명과 재산, 신성한 명예를 걸고 서로에게 맹세한다(We mutually pledge to each other our Lives, our Fortunes and our sacred Honor)’. 자유를 얻기 위해 13개 식민지 대표들의 강력한 연대를 호소하면서 여차하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결기를 담았다. 독립선언서가 정치적 문서를 넘어 시대정신을 담은 문학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글이 그림을 바꾼 경우다. 살아생전 실패한 화가가 사후에 성공한 배경에 책이 있었다. 반 고흐는 평소에 많이 읽고 많이 썼다. 특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펼쳐 보였다. 어떤 색을 쓰는지, 어떤 구도를 고민하는지,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시시콜콜 설명했다. 편지는 작업 노트이자 친절한 해설서였던 것이다.
편지에서 널리 알려진 구절이 “I am seeking, I am striving, I am in it with all my heart”이다. 나는 찾고 애쓰고 온 마음을 다한다. “What would life be if we had no courage to attempt anything?”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인생은 무엇이겠는가? 등이다. 명작 ‘The Starry Night’를 그릴 즈음에는 “밤은 낮보다 더 풍부한 색을 지녔다”고 적었다.
반 고흐의 그림과 편지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제수 요한나다. 남편 테오마저 숨지자 시숙의 편지를 차근차근 정리해 출판하면서 재평가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화가의 생애가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엮어지자 괴짜가 천재로, 거친 그림이 개성 있는 예술로 바뀌었다. 반 고흐가 쓰기를 멀리했고, 편지가 책으로 묶이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주인공 오애순(문소리 분)의 시가 잡지 ‘좋은 생각’에 실리자 남편 장관식(박해준 분)이 기뻐하는 모습. 애순의 반듯한 삶에는 글 쓰는 사람의 자존이 떠받쳤다. 구체적으로는 시인이 되어 시집을 내겠다는 꿈이 있었다.
인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오애순의 삶에도 글이 중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고아의 외로움, 새침데기 문학소녀, 강인한 어촌계장의 반듯함에는 글 쓰는 사람의 자존이 지키고 있었다. ‘소중한 이가 아침에 나갔던 문으로 매일 돌아온다는 것. 그건 매일의 기적이었네.’ 장사하는 틈틈이 문학잡지와 시집을 읽은 그는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펄펄 뛰는 언어를 구사했다.
남편이 떠난 후 드디어 시집을 냈으니 그 제목이 드라마 제목과 같다. 책의 띠지에 적힌 시가 애틋하다. “오로지 당신께. 아홉 살 적부터 여적지. 당신 덕에 나 인생이 만날 봄이었습니다. 당신 없었으면 없었을 책입니다. 다시 만날 봄까지. 만날 봄인 듯 살겠습니다.” 그가 시집을 품고 감격에 겨워 있을 때 화면에 멋진 자막이 흘렀다. “엄마는 지금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있다.”
저자가 되어 삶을 변화시킨 사례 하나 더. ‘청년 도배사 이야기’의 저자 배윤슬은 종합복지관의 정규직 사회복지사에서 도배사로 변신한 젊은이다. ‘까마득한 벽 앞에서 버티며 성장한 시간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에는 혼자 일하는 노동의 고독과 자부심, ‘노가다’라는 편견 속에 놓인 기술직 종사자의 고민이 담겼다. 단순한 수기가 아니라 일과 삶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담아냄으로써 독자들의 폭넓은 호응을 이끌어 냈다.
출판 이후 배윤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유퀴즈에 출연해 ‘아메리카노에서 믹스 커피’로 바뀐 취향을 소개해 웃음을 자아낸 이후 강연 요청이 줄을 이었다. 중앙일간지 고정 칼럼을 쓰고, 고용노동부 장관과 함께 ‘일과 삶을 이야기하는 토크 콘서트’에 출연했다. 올 들어 ‘도배레터’라는 사업을 시작했다는데, 편지에 진심을 담듯 도배에 정성을 다하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젊은이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할 수 없다.
한국중공업과 한국전력 사장을 지내 유명한 박정기 회장은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의 저자로 더 유명하다. 1989년에 첫 책을 낸 뒤 2022년에 속편을 펴낼 때 신문 인터뷰를 했다. “책을 쓰는 건 즐거운 일이다. 생활에 대한 의욕이 생겼다. 뭔가를 쓰고 싶은 노인이 있다면 일단 시작하라고 하고 싶다. 글을 쓰는 건 정신 활동에도 좋다. 보람도 있고 성취감도 있고.” 당시 그의 나이 87세였다.
독립선언문 저자를 가장 앞세운 토머스 제퍼슨의 묘비. 오른쪽은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반 고흐의 그림 ‘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
글쓰기 책을 낸 강원국의 주장은 웃기면서도 예리하다. “고령사회에서 책은 명함 같은 것이다. 그것으로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산에만 다녀야 한다. 책 쓰기는 산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 지구에 와서 살았으면, 자원을 소모하고 자연을 훼손하며 살았으면, 살면서 배우고 깨닫고 느낀 것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갈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 책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글을 쓰면 삶이 달라진다. 편의점 주인, 장례지도사, 간호사, 택시 운전사와 같은 비전문가의 글이 자주 책으로 나온다. 미술관 경비원이 쓴 ‘나는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입니다’는 필자의 팔자를 바꾸어 놓았다. 저자 패트릭 브링리는 작년에 한국에 날아와서 독자와의 대화를 갖기도 했다. 어느 분야든 자신만의 시선으로 삶을 진실하게 풀어내면 반향이 있게 마련이다.
내용은 자서전도 좋고, 산문집도 좋고, 칼럼집도 좋다. 책 내기가 어렵지 않냐고? 내용만 받쳐주면 출판사가 달려든다. 그 정도에 이르지 못해도 책은 내고 싶다고? 한만수 선생은 ‘10만 원으로 책내기’라는 비법을 전한다. 소량 출판을 해주는 경우도 많아 50만 원으로 50부의 자서전을 만들 수 있다. 박정기도 소책자 형태로 200부 인쇄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눠줬는데, 내용이 좋다고 소문나면서 정식 출판을 하게 됐다고 한다.
무릇 글 쓰는 사람은 책을 염두에 둘 일이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구슬을 잘 꿰면 목걸이가 되듯이 글이 하나의 주제에 연결되면 저술이 된다. 읽는 독자에서 쓰는 저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변신이다. 독자가 플로어에 앉아있다면 저자는 스테이지로 올라간다. 그 높이가 시선의 차이를 만든다. 세상을 더 깊게, 더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자신의 좌표를 찾아가는 여정이 즐겁고 뿌듯하다.
편집인‧언론학 박사 shonsuho@kyosu.net
손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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