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포츠

[차종관칼럼] 시대를 치유하는 스포츠의 힘

현대 사회는 유례없는 파편화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이념과 세대, 계층과 성별의 분열선은 날로 깊어지고, 정치의 언어는 사회를 통합하기보다 진영을 나누어 적대를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차종관칼럼] 시대를 치유하는 스포츠의 힘

현대 사회는 유례없는 파편화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이념과 세대, 계층과 성별의 분열선은 날로 깊어지고, 정치의 언어는 사회를 통합하기보다 진영을 나누어 적대를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동체라는 연대 의식이 희미해져 갈 때, 역설적으로 우리를 하나의 호흡으로 묶어 세우는 것은 정치적 구호가 아닌 둥근 공 하나가 그라운드를 가르는 스포츠의 현장이다. 최근 펼쳐지고 있는 유럽의 네이션스리그와 아시안 게임의 풍경은 현대 국가에서 스포츠가 지닌 사회적 가치와 잠재력이 왜 그 어떤 정치적 수사보다 강력한지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또 하나의 월드컵이라도 불리는 UEFA 네이션스리그를 지켜보며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단연 프랑스 축구대표팀의 선수층과 유려한 경기력이다. 특히 차세대 공격진의 주역으로 떠오른 마이클 올리세(Michael Olise)와 데지레 두에(Désiré Doué)의 플레이는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정교한 왼발 킥과 유연한 탈압박, 좁은 공간에서도 수비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올리세의 축구 지능은 프랑스 공격진에 새로운 창의성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폭발적인 주력과 과감한 돌파, 문전에서의 침착한 골 결정력까지 겸비한 두에의 활약은 ‘아트 사커’의 계보가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특급 유망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프랑스 축구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부러움이 앞선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화려한 스타 플레이어 개인이 아니라, 그들을 길러낸 프랑스 축구 시스템의 깊이에 있다. 프랑스의 국립축구센터 ‘클레르퐁텐(Clairefontaine)’으로 대표되는 체계적인 유소년 육성 인프라는 단순히 공을 잘 차는 기술자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프리카계, 카리브해계 등 다양한 이민자 2·3세 청소년들을 스포츠라는 공통의 언어로 포용하고, 이들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하나의 팀 스포츠 안에서 조화롭게 응축시키는 사회 통합의 용광로 역할을 해왔다. 1998년 월드컵 우승 당시 ‘블랙-블랑-뵈르(Black-Blanc-Beur, 흑인·백인·북아프리카 아랍계)’의 융합으로 국가적 자긍심을 높였던 프랑스는, 지금도 축구를 통해 다양성을 경쟁력으로 치환하는 성숙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축구가 한 사회와 국민의 정서에 미치는 응집력은 우리에게도 결코 낯선 경험이 아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은 스포츠가 빚어낸 거대한 기적을 목격했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백만의 응원단은 성별, 나이, 지역, 빈부를 초월해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함께 환호하고 울었다. 그 시절의 축구는 단순한 오락이나 승부의 영역을 넘어, 외환위기 이후 억눌려 있던 국민적 불안을 치유하고 ‘우리는 하나’라는 강렬한 공동체적 연대감을 안겨준 사회적 백신 그 자체였다.

물론 스포츠가 국가 공동체와 맺는 관계에는 명암이 공존한다. 역사적으로 스포츠는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프로파간다’나 ‘우민화 정책(3S 정책)’의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국가주의가 과열될 때 스포츠는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타국에 대한 배타적 적대감을 부추기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낸다. 반면, 스포츠를 국가 발전의 지표이자 무해한 대중문화로만 바라보는 중립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스포츠의 본질적 차이는 명확하다. 정치가 외부로부터의 주입과 선동을 통해 인위적인 동원을 꾀한다면, 스포츠가 이끌어내는 감동은 날것 그대로의 땀방울과 페어플레이, 그리고 각본 없는 드라마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의 순수한 공감에서 출발한다. 승패를 떠나 한계를 극복하려는 선수의 투혼 앞에서 대중은 조건 없는 경의를 표하며, 그 과정에서 개별화된 개인들은 ‘우리’라는 강력한 사회적 유대감을 자연스럽게 체화한다. 이것이 바로 스포츠가 가진 가장 밝은 이면이자, 분열된 사회를 결합하는 대체 불가능한 치유의 힘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돌아볼 때, 최근 아시안 게임 등에서 나타난 한국 스포츠의 사회적 영향력은 2002년의 감동이나 과거의 울림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엘리트 체육 중심의 낡은 패러다임과 메달 지상주의는 대중의 피로감을 키웠고, 병역 특례 논란 등으로 인해 스포츠가 제공하던 순수한 카타르시스는 공정성에 대한 시비로 얼룩지기도 했다. 생활 체육과의 유기적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성적에만 매몰된 스포츠 행정은 새로운 세대와의 정서적 교감을 이끌어내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우리가 프랑스 축구 시스템과 과거 우리의 환희로부터 배워야 할 반성적 교훈은 분명하다. 스포츠를 단순히 국가 브랜드 제고나 정치적 치적의 수단으로 소비하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포츠는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계층 간의 벽을 허물며, 공동체의 신뢰 자본을 축적하는 핵심적인 사회적 공공재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엘리트 선수의 성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풀뿌리 유소년 클럽 시스템을 튼튼히 하고 다문화 가정과 소외 계층 청소년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동등한 꿈을 꿀 수 있는 포용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이다. 대표적인 예가 충북 음성군 ‘대소유소년축구단’이다. 축구단은 2006년에 창단된 비영리 주말 축구교실로, 최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축구 금메달리스트인 신민하 선수를 배출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손흥민, 이강인과 같은 세계적인 스타의 활약에 열광하는 것을 넘어, 학교 운동장과 동네 축구장에서 시민들이 함께 땀 흘리며 서로를 이해하는 문화가 정착될 때 한국 스포츠는 진정한 도약을 이룰 수 있다. 체육관 또는 녹색 잔디 위에서 펼쳐지는 정직한 승부와 땀방울은, 삶에 지치거나 계층간 갈등과 혐오로 메말라가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강력하고 따뜻한 통합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차종관 세움교회 목사, 전 성결대 교수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