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지역 미술 누가,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경남 지역 미술 현장에서는 늘 전시가 열리고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만, 그 활동을 진지하게 살피고 기록하는 글은 거의 없다. 지역에서 어떤 미술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작가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작업하는지 꾸준히 기록하는 전문 미술비평가가 필요한 이유다.

지역 미술 누가,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조은비 미술 비평집 <주름과 외투>

부산·경남 지역 미술사와 작가 조명

현장 경험 비평으로 기록하고 재해석

10월 31일 창원 문화공간 무하유에서 열린 <주름과 외투> 북토크에서 조은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지역 미술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주제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서후 기자

경남 지역 미술 현장에서는 늘 전시가 열리고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만, 그 활동을 진지하게 살피고 기록하는 글은 거의 없다. 지역에서 어떤 미술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작가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작업하는지 꾸준히 기록하는 전문 미술비평가가 필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조은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쓴 미술 비평집 <주름과 외투>(콩밭출판사)는 반갑고도 부러운 책이다. 책은 부산 미술을 지역 시각에서 진지하게 파고든다. 작가와 작품, 전시와 공간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지역의 역사를 읽어낸다. 지역 미술을 한국미술사의 주변에 놓는 대신, 지역에서 출발해 한국미술사를 다시 들여다보려고 애쓴다.

지난달 31일 창원시 성산구 사파동 복합공간 무하유에서 열린 책이야기마당(북토크)에서 조 학예사는 책을 쓰게 된 계기와 지역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 비평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이날 행사는 책을 펴낸 창원 콩밭출판사에서 진행했다.

조 학예사가 지역 미술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부산에서 활동한 추상화가 오영재의 작품이었다. 피아노를 공부하다 미학과 영화 연구를 거쳐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오 작가의 작품을 만났다. 깊은 인상을 받아 작가를 더 알아보려 했지만,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부산 미술이라는 게 한국 미술사에서 아예 기술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게 너무 이상했어요. 그게 한국 미술을 위해서도 건강하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그는 직접 작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기존 자료를 검토하고 선배 평론가 조언을 받아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도 거쳤다. 이후 개별 작가 연구와 현장 비평을 이어갔다. <주름과 외투>는 이렇게 부산 미술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조은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쓴 미술비평집 <주름과 외투>. /콩밭출판사

경남과 부산, 분리할 수 없는 미술의 역사

책은 부산 미술을 중심으로 쓰였지만 경남 미술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산은 1963년 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경남도에 속했다. 오랫동안 부산에 경남도청이 자리했고, 작가들은 오늘날과 다른 행정구역 안에서 활동하고 교류했다. 부산과 경남은 근현대 미술 형성 과정에서 상당한 역사를 공유한다.

조 학예사도 북토크에서 부산과 경남의 경계가 과거에는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부산 미술을 연구한다고 해서 행정구역 안에서만 작가를 찾지는 않는다. 작가가 실제로 활동한 장소와 작업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작가 중에는 경남을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관련이 있는 이들이 있다.

오영재는 부산 영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 양산 법기수원지로 거처를 옮겨 그곳 환경에 어울리는 ‘파라다이스’ 연작을 남겼다.

통영 출신 송정인 작가는 자수에 재능을 발견하고 열일곱 살 무렵 더 다양한 색의 실을 구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통영에서 구할 수 있는 자수실의 색은 제한적이었지만, 직물산업이 발달한 부산에서는 훨씬 다양한 재료를 접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그는 기존 자수 기법에 머무르지 않고 추상회화 기법을 도입했다.

부산에서 활동한 추상화가 오영재가 양산 법기수원지에 머물며 작업한 작품 ‘파라다이스’. /경남도립미술관

통영 출신으로 부산에서 자신만의 추상 자수를 발전시킨 송정인 자수 작가의 ‘벽걸이’. /경남도립미술관

노순천 작가 <조각합주단: 리믹스> 전시 풍경. /이서후 기자

창원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노순천과 최수환 작업 비평도 책에 담겼다. 조 학예사는 특히 노 작가의 소리 조각을 분석하면서 작품이 놓이는 공간과 작가가 살아온 환경을 연결해 해석했다.

이날 북토크에 참석한 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비평으로 마산에서 성장한 환경과 바다에 대한 경험이 작품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작품에 쌓인 시간과 흔적을 읽다

조 학예사는 그동안 한국미술사에서 부산 미술이 형상미술이나 구상미술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평생 추상회화를 연구한 오영재처럼 기존 설명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작가들도 있다.

그는 지역 미술을 몇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기보다 개별 작품과 작가의 활동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이 항구도시로서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전쟁 때 피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다양한 예술적 실험이 이루어졌던 역사도 중요하게 다룬다. 특히 다방을 중심으로 미술가와 문학가, 음악가들이 교류했던 시기에 주목한다.

책 제목에도 이러한 생각을 담았다. ‘주름’은 작품과 작가, 시대에 축적된 시간과 흔적을 뜻한다. ‘외투’는 그 흔적을 언어로 감싸고 보호한다는 의미다.

외투라는 표현은 노아의 허물을 외면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옷으로 덮어주는 성경 이야기에서 착안했다. 조 학예사는 자신이 마주한 미술 현장을 평가의 대상으로만 대하기보다 우정과 존중의 태도로 기록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작가와 무조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작품을 충분히 살피기 전에는 작가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작가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작품 자체를 오래 관찰하고, 자신의 감각과 판단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다.

“감상이 전제되지 않은 비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작품을 충분히 감상하지 않고 이론이나 전문용어에 기대면 다른 작가의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은 글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비평을 쓸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작품을 보지 못한 사람도 그 글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10월 31일 창원 문화공간 무하유에서 열린 <주름과 외투> 북토크에서 조은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가 경남 지역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서후 기자

지역, 주변이 아닌 출발점으로

북토크 참석자들이 특히 공감한 것은 지역 미술을 대하는 조 학예사의 태도였다.

그는 주변에서 부산 미술 연구에만 머무르지 말고 아시아나 더 넓은 세계로 관심을 확장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부산)을 주변부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도 직접 마주한 현장을 중심으로 지역 미술 연구를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그의 비평은 현장에서 출발한다. 전시를 보고 작품을 오래 관찰하며 작가와 작품, 공간에 관한 자료를 모은다. 그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하고 한국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다시 살펴본다. 거창한 이론으로 지역 미술을 설명하기보다 지역에서 발견한 작품과 질문을 통해 기존 미술사의 서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역을 주변이 아니라 미술사를 다시 읽는 출발점으로 삼자는 그의 생각에 참석자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 미술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은 지역 작가 몇 사람의 이름을 미술사에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작품과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던 미술사의 빈틈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전시, 남아야 할 기록

이날 북토크에 참가한 지역 작가들은 경남 미술 현장에서 비평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타인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평가한 글을 원하지만, 경남에서는 이를 담당할 비평가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수환 조각가는 분석한 작가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은 비평문이 많은데, 조 학예사의 글은 특정 작가의 작품을 깊이 살핀 흔적이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조 학예사는 비평에 지나치게 큰 권위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비평가 자신보다 작품이 먼저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비평을 지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록에 있다. 전시가 열릴 때마다 안내문과 도록, 홍보물이 만들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구하기 어려워진다. 작품은 남더라도 그 작품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쉽게 사라진다.

그는 현장에서 본 것을 자신의 언어로 꾸준히 기록하고, 그렇게 축적된 글들이 훗날 읽을 수 있는 미술의 역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 학예사는 앞으로도 개별 작가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당초 한국 근현대 미술과 부산 미술을 오가며 30권가량의 연구서를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주름과 외투>는 그 계획 속에서 세 번째로 나온 책이다.

/이서후 기자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