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특별한 사건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주목합니다. 거창한 해석이나 결론보다는, 각자의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과 감정, 생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빠르게 소비되는 뉴스의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는 코너입니다.
[아시아에이=이준호 기자]
"유튜브는 무조건 1.5배속이죠. 전주가 10초 넘어가는 노래는 스킵하고, 드라마는 결말 포함 요약본으로 먼저 봅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와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 시대를 지나, 이제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가 소비 시장과 라이프스타일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희소한 자원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1분 1초의 틈새조차 낭비하지 않으려는 효율 강박은 우리 일상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2시간 앉아있기 힘들어"...숏폼에 갇힌 도파민, 멀어진 극장
=가장 직관적인 변화는 콘텐츠 소비 방식에서 나타난다. 최근 극장가에서 1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영화 '왕과 사는 남자'조차 보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영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유튜브 쇼츠나 틱톡 등 1분 남짓한 숏폼 영상의 빠르고 강렬한 도파민에 익숙해진 탓에, 2시간 가까운 긴 호흡의 서사를 가만히 앉아 따라가는 것 자체를 힘겨워하기 때문이다.
결국 넷플릭스 같은 OTT는 1.5배속으로 틀어놓고, 아예 영화나 드라마를 유튜브 '결말 포함 20분 요약본'으로 소비해 버리는 것이 흔한 일상이 됐다. 콘텐츠를 온전히 음미하기보다, 실패할 확률을 줄이고 남들과 대화할 수 있는 '핵심 정보'만 빠르게 취하려는 극단적인 시성비 추구 현상이다.
기잔느 대학생 시절 영화를 좋아해 관련 수업을 찾아 듣고 단편 영화를 찍기도 했다. 이런 탓에 영화를 보는 것에 꽤나 엄격한 사람이었다. 한 장면도 놓치면 안 되고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봐야 한다는 게 원칙이었다. 집중을 깨기 때문에 팝콘도 잘 먹지 않았다.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은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지경이다. 심지어 출퇴근길 지하철에선 유튜브에 '결말 포함 영화 리뷰'를 자연스레 검색한다.
삼성전자 '비스포크 AI 스팀' 로봇청소기 [사진=삼성전자]
◇"내 시간은 돈으로 산다"...시성비가 쏘아 올린 가전 혁신
=이러한 시성비 트렌드는 집 안 풍경도 바꾸고 있다. 청소, 빨래, 설거지 등 가사 노동에 들어가는 물리적인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이른바 '3대 이모님(로봇청소기·식기세척기·건조기)'은 이제 혼수 1순위를 넘어 필수 가전이 됐다.
글로벌 시장정보업체 GfK에 따르면 국내 로봇청소기 시장 규모는 2023년 4300억원에서 올해 1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더불어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기로 옮기는 그 짧은 과정조차 아끼려는 소비자 니즈는 아예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삼성전자 일체형 세탁건조기 '비스포크 AI 콤보'는 출시 1년 만에 누적 판매량 10만대를 돌파하며 하루 평균 230대씩 팔려나가는 돌풍을 일으켰다. 집안일을 가전과 AI에 외주화하고, 그로 인해 확보된 자투리 시간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쓰겠다는 뚜렷한 소비 패턴이다.
넷마블 방치형 RPG 신작 '스톤에이지 키우기' [사진=넷마블]
◇조작할 시간도 아깝다...게임판 휩쓰는 '방치형' 트렌드
=시성비 열풍은 여가 생활 대표 주자인 게임 산업 지형도마저 뒤흔들고 있다. 과거처럼 PC 앞에 몇 시간씩 각 잡고 앉아 몬스터를 사냥하고 레벨을 올리는 하드코어 MMORPG 시대가 저물고, 앱을 꺼둬도 캐릭터가 알아서 성장하는 '방치형 게임'이 국내 주요 앱마켓 매출 상위권을 휩쓰는 중이다.
출퇴근길 지하철 안이나 점심시간에 잠깐 접속해 10분 남짓 보상을 챙기고 빠지는 '스낵 컬처' 형태 게임 소비가 주류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흐름은 대형 게임사들의 전략까지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그동안 묵직한 대작 게임에 집중하던 엔씨소프트조차 글로벌 게임 시장 30% 이상을 차지하는 모바일 캐주얼 분야를 새로운 핵심 성장 동력으로 낙점하고 '모바일 캐주얼 센터'를 신설, 사업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넷마블 역시 최근 방치형 RPG 신작 '스톤에이지 키우기'를 글로벌 시장에 출시하는 등 주요 대기업들이 앞다퉈 방치형 게임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모양새다.
과거 상대적으로 개발 문턱이 낮아 중소 개발사들이 주로 도전하던 방치형 장르가 극단적인 시성비를 추구하는 유저들의 입맛과 맞물려 이제는 게임업계 주류이자 핵심 수익원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실제로 모바일 데이터 분석 기업 센서타워에 따르면 방치형 게임 점유율은 지난 2020년 1.7%에서 2024년 16%로 폭발적인 급성장을 기록했다. "게임을 직접 조작하고 스트레스받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게이머들의 심리가 모바일 게임 생태계를 가볍고 빠른 템포 위주로 완전히 재편하고 있는 셈이다.
◇"시성비의 역설" 그렇게 아낀 시간, 어디에 쓰고 있나
=기술 발전과 시성비를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 덕분에 현대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잉여 시간'을 갖게 됐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한다. 우리는 가전제품이 벌어다 주고, 1.5배속 시청으로 아껴낸 그 금쪽같은 시간을 또 다른 숏폼 영상을 하염없이 넘겨보는 데 태우거나, 끊임없이 밀려드는 디지털 자극을 소비하는 데 흘려보내곤 한다.
여백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1.5배속으로 채워 넣어야만 안심하는 사회. 극도의 효율을 쫓아 도달한 종착지가 역설적으로 또 다른 '시간의 휘발'은 아닌지, 지금 우리 자화상을 되돌아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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