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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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년에 이르렀을 무렵, 직계 조상인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이 일흔을 훌쩍 넘긴 1631년에 ‘우주설’(宇宙說)이라는 책을 저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해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 유명한 종교재판을 받기 2년 전으로, 아직 아이작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 시기이다. 바로 이 시기 우리의 조상들은 우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가 매우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무도 이 책의 내용을 현대 우리말로 번역해 놓지 않았고, 심지어 이 책에 대한 그 어떤 소개도 없었다.
이 상황이야말로 자칭 ‘공부도둑’이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조선 중기 유학자 여헌 선생의 책에 뛰어들기 전에 먼저 점검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우선 그 책의 현존 여부부터 확실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관에 문의했더니, 알려진 목록에는 없고 자기들이 좀 더 찾아본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연락이 왔는데, 그 책은 여덟권으로 된 ‘여헌성리설’ 가운데 제8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주설’ 전권 복사를 의뢰했고, 그렇게 책의 복사본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우주설’ 본문만 62쪽 그리고 부록인 ‘답동문’(答童問)이 23쪽, 모두 85쪽에 이르는 책 전체가 한 글자의 빈자리도 없이 한자들로 꽉 들어차 있지 않은가? 내게 주 무기는 ‘물리학’이라는 마스터키인데, 이것으로는 손도 대볼 수 없는 중세 성곽에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려니 적어도 몇년이라는 한문 수련이 필요한 것이고, 그러지 않으려면 약한 고리를 찾아 홀로 성벽 넘기를 시도해 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다행히 나는 한글 전용 세대는 아니어서 글자들은 상당 부분 익숙했으므로 한문 문법책 몇권과 두꺼운 옥편 몇권을 옆에 놓고 첫 글자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어려운 부분은 규장각의 전문가에게 문의하면서 몇개월 고생한 끝에 드디어 전체를 해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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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이라는 내 마스터키는 한문 해독 자체에는 무용지물이지만 실제 내용 파악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물리학을 몰랐더라면 알아보지 못했거나 잘못된 판단에 이르렀을 것을 이것의 도움으로 그 의미와 중요성을 밝힐 수 있었던 부분들이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두가지만 제시하겠다.
하나는 “대지(大地, 오늘날 지구)가 허공에 떠 있으면서 왜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것을 요즘 사람들은 그저 잘못된 물음이라고 보아 가볍게 넘길 것이다. 그런데 이 안에는 심각한 의미가 담겼다. 당시 사람들은 공간을 3차원으로 본 것이 아니라 2+1 차원으로 보았다. 같은 공간이지만 ‘상하’(1차원)와 ‘사방’(2차원)은 본질적 차이가 있는데, 그 하나가 ‘상하’에는 “떨어진다”는 성격이 있고 ‘사방’에는 그런 성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외가 나타났다. 대지라고 하는 엄청나게 무거운 물체가 이 규칙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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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여헌의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뉴턴이 깔끔하게 해결했다. 공간은 3차원이어서 원칙적으로 상하와 사방 사이에 구분이 없다. 따라서 상하라고 하여 특별히 떨어진다는 성격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왜 떨어지는가? 이것은 공간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물체들이 서로 당기기 때문인데, 지구상의 물체는 지구가 당기기 때문이지만, 지구 자체는 지구가 당기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부록인 답동문에 나오는 말로, “이치(理)를 캔다고 하는 것은 마음과 뜻을 터무니없고 허무한 일에 뛰놀게 두는 것이 아니다. … 사물을 좇아 뚫어보는 일 없이 어떻게 참된 앎에 이를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하늘과 땅을 비롯한 천지 만물을 눈과 귀를 동원해 살피고 그 이치를 추궁하라 한다. 그렇게 하면 이 이치와 현재의 사실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이야말로 물리학, 특히 고전역학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를 실현시킨 것은 서구과학이고, 여헌의 후예들인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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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설’을 파고든 도전으로 인해 내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은 한문의 해독 능력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성리학을 비롯한 동양 학문에 눈뜨게 되었다. 이후 동서양의 학문의 성격을 비교 연구하는 작업에 착수해 몇몇 글들을 썼고, 지금은 동서양의 학문을 넘나들면서 앎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본질적 물음에 도전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설혹 공부도둑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한계, 즉 생리적 노화는 피해 갈 수 없다. 그리고 그 해법은 이미 정년퇴직이라는 방식으로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학문을 내려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라면 매우 부적절하다.
두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로, 진정한 학자에게는 학문 추구가 곧 삶의 분리할 수 없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학문 활동이란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한 노역이기보다는 그것 없이는 구현하기 어려운 삶의 한 방식이다. 둘째로는 나이가 들면서 더 잘할 수 있는 학문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이 든 사람은 그간의 경험이 풍부하기에 이러한 경험이 학문의 소재나 수단이 될 경우, 이는 나이 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학문이 된다. 설혹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학문에 대한 지혜는 깊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지혜를 의미 있게 활용할 수만 있다면 이는 나이 들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영역이 된다.
크게 보아 나이 듦에서 오는 취약점은 두가지다. 그 하나는 지적 활동의 강도가 떨어져 강한 집중력을 가지고 작업을 수행해 내는 능력이 감소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기억력이 감퇴하여 이미 기억했던 내용조차도 선별적으로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기억 자체가 선별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본인이 중요하게 여겨 깊이 각인시킨 내용일수록 오래 저장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이 먼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본인이 중요하게 여긴 앎만 주로 걸러져 남게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젊어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지혜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가을에 낙엽이 지고 나면 굵은 나무줄기가 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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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강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가치중립적 학문일수록 젊은 시기에 하는 것이 좋고, 넓은 영역에 걸친 통합적, 가치 의존적 학문일수록 높은 연령대에 오히려 적합하리라 추정할 수 있다. 내가 오래전에 본 어느 조사에 따르면, 가장 수명이 짧은 학문이 수학이며, 그다음이 이론물리학이고, 생물학, 의학 등의 순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상대적 학문 수명이 길어지는 반면, 인문학 분야의 학문들은 다소 늦은 나이에 학문 성과를 내기 시작하여 가장 늦은 시기까지 학문 활동이 지속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학문의 영역을 쉽게 넘나드는 공부도둑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내 경우 취향에 따라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학문 진로를 바꾸어 오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와 엇비슷한 학문 경로를 밟은 셈이 되었다. 즉 젊어서는 수학, 물리학에 치중했고, 그다음에 생명과학을 그리고 점점 더 통합적인 학문으로 들어가 지금은 구태여 규정을 하라면 인문학에 가까운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한우물만 파라”고 하는 널리 입증된 생활 철학에는 크게 벗어난 것이지만, 통합적 학문을 지향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제대로 된 길을 걸어온 셈이다.
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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