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사업체·인력 등 제자리인데
자동화·다층공장·고부가 전환효과
첨단제조업 생산지수 91→204 쑥
연구는 도심, 제조시설은 외곽 산단
기능별 거점 나눠 생산성·효율 높여
경기 남부~충청 북부 산업권역 재편
남동국가산업단지 전경.
수도권 제조업의 성장 공식이 바뀌고 있다. 공장을 늘리지 않고도 생산을 두 배 이상 끌어올리는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산업의 중심이 ‘확장’에서 ‘재배치’로 옮겨가고 있다. 자동화와 고부가가치화로 같은 공간에서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압축 성장’이 나타난 데 이어, 최근에는 연구개발(R&D)과 생산 기능을 분리해 최적 입지에 배치하는 방식이 새로운 전략으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19일 통계청과 한국산업단지공단 산단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전자·정보통신 등을 중심으로 한 첨단 제조업 생산지수는 2020년 91.1에서 2024년 204.2로 4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반면 같은 기간 수도권 제조업 사업체 수는 6만~8만 개, 종사자 수는 110만 명 안팎에서 큰 변동이 없었다. 공장과 인력이 거의 늘지 않았는데도 생산만 급증한 셈이다.
이는 수도권 제조업이 자동화 설비, 다층형 공장, 고부가가치 산업 전환을 통해 한정된 공간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과거처럼 공장 부지를 넓히고 인력을 대거 충원해 생산을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같은 면적 안에서 더 정밀하고 더 비싼 제품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수십 년에 걸친 산업 구조 재편이 있다. 서울대 구양미 교수팀 연구에 따르면 한국 제조업의 공간 구조는 1960~1980년대 산업단지 조성기, 1990년대 중반 이후 수도권 규제 완화기, 2000년대 이후 지식집약 제조업 집중기를 거치며 현재의 형태로 굳어졌다. 특히 1994년 수도권정비계획법 전면 개정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물리적 입지 규제에서 경제적 규제인 과밀부담금 중심으로 체계가 바뀌면서 수도권 내 신규 투자의 길이 사실상 넓어졌고, 이후 삼성전자 화성사업장과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등 대기업 생산거점이 잇따라 수도권에 자리 잡았다.
제조업의 무게중심도 서울에서 경기로 이동했다. 화성시의 제조업 종사자는 1994년 5만5816명에서 2021년 25만7574명으로 361% 늘었고, 파주시도 같은 기간 357% 증가했다. 반면 서울은 80만8585명에서 26만7489명으로 67% 감소했다. 제조 기능이 도심에서 빠져나와 경기 남부와 북부 산업 거점으로 재편된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압축 성장마저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기업들이 한 단계 더 나아간 전략을 택하고 있다. 핵심은 기능 분리다. 인재 확보와 기술 협업이 중요한 본사·R&D는 서울과 과천, 판교 같은 도심·준도심에 두고, 실제 양산은 인천·용인·안산·충북 음성 등 산업단지와 물류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양자기술 기업 SDT는 인천에서 창업한 뒤 인재 확보를 위해 본사를 서울로 옮겼고, 최근에는 제조시설을 다시 인천으로 확장 이전하기로 했다. 엠케이전자는 본사와 R&D 기능을 과천으로 옮기고 생산은 용인에서 맡도록 했다. 시너스텍도 설계 기능은 과천에, 양산은 안산과 충북 음성에 나누는 3거점 체제를 구축했다. 연구와 생산을 한곳에 몰아넣기보다 기능별 최적지를 택하는 구조다.
이 같은 흐름은 글로벌 기업들의 전략과도 닿아 있다. TSMC가 최첨단 공정 R&D는 대만에 집중하고 양산 공장은 미국과 일본 등으로 분산하는 방식과 같은 맥락이다. 첨단 제조업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부지 확보가 아니라 우수 인재 확보, 고객사와의 기술 소통, 연구와 생산 현장의 신속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도권 제조업은 ‘서울은 R&D, 경기·인천은 생산’이라는 식의 역할 분화를 더 뚜렷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가 하나의 산업 권역처럼 묶이고, K-반도체 벨트 전략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다만 수도권 집중이 심화할수록 비수도권 산업도시의 공동화는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우한성 한국산업단지공단 산단정책연구소 박사는 “서울 기업들이 경기로 이전하면서 기능적 분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서울은 R&D, 경기·인천은 생산으로 역할이 나뉘면서 수도권 제조업의 성장 경로가 차별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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