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블랙 스완(Black Swan)’을 넘어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상시적 변수로 고착화하고 있다. 널뛰는 환율 변동성과 국제 에너지 가격의 급등, 글로벌 해상 물류망의 병목 현상은 수출 주도형인 우리 산업계의 하방 압력을 극대화하는 형국이다. 특히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높은 국내 경제 구조의 특성상, 이번 사태의 파고는 단순히 에너지 다소비 업종을 넘어 제조업 전반과 자본시장까지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이에 <직썰>은 [중동 쇼크, 한국 산업계를 덮치다] 기획 시리즈를 통해 ▲주요 업종별 피해 실태 ▲기업들의 극한 비상 경영 전략 ▲정부 대책의 실효성을 집중 진단하여 한국 경제의 생존 해법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카타르 라스라판 산업단지 가스 생산 시설. [연합뉴스]
[직썰 / 김강호 기자] 카타르발 헬륨 수급 불안이 커지면서 국내 반도체업계에 공장 셧다운 우려가 커지고 있다. 헬륨은 웨이퍼 냉각과 장비 운영에 쓰는 공정 필수 가스다. 공급 차질이 길어지면 일부 라인 가동 조정과 생산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업계는 당장 생산라인이 멈출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수급 불안이 수주 이상 이어지면 조달 비용이 오르고 생산계획 조정 부담도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생산 우선순위 재편도 변수다. 업체들이 HBM 등 고부가 제품을 우선 생산하면 범용 메모리 공급은 더 빠듯해질 수 있고 여파는 PC·스마트폰 등 세트업계의 부품 조달 부담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카타르발 공급 차질…헬륨 수급 불안 확산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헬륨 수입량은 211만톤으로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이 가운데 65%인 137만톤이 카타르산으로, 현지 공급 차질은 국내 반도체 공정에도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
카타르는 19일(현지시간) 한국 등과 맺은 장기공급계약에 수년간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이란의 LNG 설비 공격으로 전체 생산의 17% 규모 용량이 타격을 입은 여파다. LNG 생산이 줄면 부산물인 헬륨 공급도 함께 감소한다.
헬륨은 반도체 공정 전반에 쓰인다. 웨이퍼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장비 내부 환경을 제어하는 데 필요하다. 공급이 흔들리면 원재료 가격만 오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필요한 시점에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생산 일정과 가동 계획도 함께 영향을 받는다.
대체가 쉽지 않다는 점도 부담이다. 다른 산업용 가스로 바로 바꾸기 어렵고 저장과 운송도 까다롭다. 재활용 설비로 사용량을 줄일 수는 있지만 외부 공급 감소를 모두 메우기는 어렵다. 공급 차질이 길어질수록 외부 조달 부담은 더 커진다.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확보한 재고가 있어 당장 생산라인이 멈출 상황은 아니다”라며 “다만 공급 불안이 길어지면 조달 비용과 공정 운영 부담이 함께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SK하이닉스]
◇재고로 단기 대응 가능…장기화 땐 가동 조정 불가피
헬륨 공급 차질이 단기에 그치면 재고와 기존 계약 물량으로 대응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급 불안이 수주 이상 이어지면 현물 조달 비중이 높아지고 대체 물량 확보 경쟁도 심해질 수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레이팅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카타르 LNG 생산 차질이 한국과 대만 반도체 공급망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공급 불안이 6주를 넘기면 헬륨 가격이 최대 200%까지 오를 수 있다고 봤다.
가격이 뛰면 대체 조달 비용도 커진다. 카타르산보다 비싼 물량을 들여와야 하고 긴급 운송비와 추가 재고 확보 비용도 붙는다. 재고를 더 쌓으려는 움직임까지 겹치면 자금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원가 상승이 길어질수록 수익성 방어도 어려워진다.
조달 부담은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처음에는 생산 속도 조절과 정기보수 일정 조정, 일부 라인 가동률 하향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이후에도 물량 확보가 어렵다면 특정 공정이나 일부 라인부터 부분 중단에 들어갈 수 있다. 제목에 담긴 셧다운 우려도 이 단계에서 나온다.
라인을 멈췄다가 다시 돌리는 과정도 부담이다. 재가동 비용이 들고 납기 지연 부담도 커진다. 고객사 대응 비용까지 늘어나면 실적에 미치는 영향도 작지 않다.
◇HBM 등 고부가 제품 우선생산…세트업계 부품 수급 흔들
헬륨 공급이 빠듯해지면 반도체업계는 생산 우선순위를 다시 짤 가능성이 크다. 제한된 공정 자원을 모든 제품에 같은 수준으로 배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수익성이 높은 제품군에 공정 자원이 우선 배정된다.
AI 서버용 HBM과 고사양 D램, 고부가 시스템반도체는 우선 생산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범용 메모리와 저수익 제품군은 생산 순위가 뒤로 밀릴 수 있다. 이미 업계가 AI 수요 확대에 맞춰 고부가 제품 비중을 높여온 만큼, 헬륨 변수까지 겹치면 범용 제품 공급은 더 빠듯해질 수 있다.
범용 메모리 수급이 흔들리면 세트업계 부담도 커진다. PC·스마트폰 등 완제품 업체는 메모리와 주요 부품 가격 상승을 떠안아야 한다.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량과 납기까지 변동성이 커지면 출시 일정과 재고 전략도 함께 조정해야 한다.
세트업계 입장에서는 불확실성도 부담이다. 가격이 오르면 원가 계획을 다시 세우면 되지만, 공급 불안은 가격과 물량, 납기를 함께 흔든다. 신제품 출시 시점과 판촉 전략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생산 여력이 줄면 업체들은 수익성이 높은 제품부터 우선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며 “그럴수록 범용 메모리를 많이 쓰는 세트업계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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