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국경제의 도약을 위해 추진 중인 '생산적 금융'이 중동발 악재를 만났다. 중동사태로 인한 고환율·고유가·고금리 '3고(高)'가 한국경제를 덮치면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생산적 금융'에도 충격이 전이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정된 재원으로 중동발 위기에도 대응해야 하다보니, 자칫 생산적 금융이 후순위로 밀릴 수도 있어서다. 본지는 3회에 걸쳐 '생산적 금융'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생산적금융이 속도를 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본다./편집자주
[서울파이낸스 오세정 기자] 정부가 '생산적 금융 대전환'을 내세우며 은행권 자금을 부동산에서 산업으로 돌리려 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정책 취지와 다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은행권이 생산적 금융을 위한 체질 전환에 속도를 내면서 기업대출 규모도 늘었지만 사실상 '외형만 바뀐 구조'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이 제조업이나 혁신 산업이 아닌 부동산 관련 업종으로 향하거나, 은행들이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기존 영업 관행을 유지하고 있단 분석이 나온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금융당국은 생산적 금융 확대를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생산적 금융은 가계대출과 부동산 금융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첨단 산업과 중소·벤처기업 등 성장 분야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올해 가계대출 총량 증가율 목표를 1.5%로 낮추는 등 관리 기조도 강화했다.
이 같은 정책 변화에 맞춰 은행권은 올해를 사실상 '생산적 금융 원년'으로 삼아 관련 조직과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5대 금융그룹(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 2030년까지 총 508조원 규모의 생산적·포용 금융 공급 계획을 제시했다. KB금융과 신한금융이 각각 110조원, NH농협금융이 108조원, 하나금융이 100조원, 우리금융이 80조원이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기업 투자와 혁신 산업 지원에 투입될 예정이다.
내부적으로도 조직과 성과체계를 전면 개편하며 실행 기반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생산적 금융 협의체'와 '성장금융추진본부'를 신설하고 KPI에 관련 지표를 반영했으며, 기업금융 인력 비중을 장기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신한금융은 CEO 직속 '생산적 금융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컨트롤 타워를 구축했고, 하나은행과 우리금융, NH농협은행도 각각 전담 조직과 협의체를 신설하거나 강화하며 첨단산업 여신에 대한 KPI 우대 등 인센티브 체계를 정비했다.
심사 역량 강화도 병행되고 있다. 은행들은 산업별 특화 조직과 전담 심사조직을 확대하고, 전문 인력 육성과 평가모형 고도화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기존 재무제표 중심 평가에서 벗어나 특허·연구개발(R&D)·거래 정보 등 비재무 데이터를 반영한 신용평가 체계를 도입하고 있다. AI 기반 심사 시스템을 활용해 기업대출 평가 정밀도를 높이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첨단전략산업 전담 심사조직 '첨단전략산업심사 유닛(Unit)'과 AI 심사 시스템 '빅스(Bics)'를 고도화했고, 신한은행은 '초혁신경제지원팀'을 중심으로 산업별 심사 기준을 세분화했다. 하나·우리·농협은행 역시 전담 심사조직 신설과 AI 기반 여신 프로세스 도입 등을 통해 기업 대출 심사와 사후관리 전반의 체계 정비에 나서고 있다.
표면적인 지표만 보면 변화는 뚜렷하다. 5대 은행의 지난달 말 기준 기업대출 잔액은 859조7737억원으로 한 달 새 5조4449억원 증가했다. 반면 가계대출은 1364억원 줄었다. 주택담보대출이 전월 대비 3872억원 줄어든 영향이 컸다. 은행권 자산 포트폴리오가 가계 중심에서 기업 중심으로 이동하는 흐름 자체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자금 이동의 '방향'이다. 기업대출이 늘고 있음에도 산업별 자금 배분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을 보면 지난해 5대 은행의 기업 대출 잔액은 839조원으로 전년 대비 3.2% 증가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기업 대출 내 제조업 비중이 2015년 31.2%에서 지난해 25%로 감소했고, 부동산 임대업 비중은 같은 기간 21.4%에서 26.1%로 확대됐다. 규모 측면에서도 제조업 대출은 130조원에서 209조원으로 79조원 늘어난 데 그친 반면, 부동산 임대업 대출은 89조원에서 218조원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기업대출 증가분이 제조업 등 산업보다 부동산 관련 업종으로 더 빠르게 유입된 셈이다. 정부가 의도한 '산업으로의 자금 이동'이 아니라 외형만 확대된 채 자금 흐름은 기존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괴리가 정책과 현장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생산적 금융은 통상 '혁신기업·성장산업 지원'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인 업종 기준이나 판단 기준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태다. 이 때문에 일선 여신 현장에서는 혼선이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개별 은행마다 생산적 금융에 대한 의미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고 "너무 광범위하고 정의가 모호하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나왔다.
또 은행들이 담보가치가 명확해 수익 안정성이 높은 부동산 담보 대출 중심의 영업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조업 등 기업 대출은 경기 변동에 따른 부실 위험이 상대적으로 큰 만큼 우량 대출처 선별 능력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선 기존 영업 방식의 전면적인 수정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담보 대출은 담보 가치에 대한 분석이 중요한 반면, 기업대출은 부도 확률이 적은 차주를 고르는 것이 주된 심사 기준이다.
대외 환경도 변수다. 중동 리스크로 환율과 시장금리 변동성이 커지면서 기업 투자 심리가 흔들릴 가능성이 커졌다. 생산적 금융은 결국 기업의 투자 수요가 뒷받침돼야 작동하는 만큼, 대외 불확실성이 장기화할 경우 자금 집행 속도와 대상 산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금융권 안팎에선 올해를 생산적 금융 전환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부동산 시장이 악화한 데다 새 정부 들어 가계대출 관리에 나서면서 은행들도 메스 금융이나 개인을 대상으로 한 가계대출은 줄이고 수익구조 다변화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면서 "가계대출 규제로 은행 자금이 기업으로 이동하는 흐름은 분명하다. 향후 신성장 산업을 중심으로 기업금융 경쟁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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