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죽령장승제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사이 '죽령고개'
제37회 죽령장승제 ‘세계평화·만인행복’ 명문 담아
선비정신 곁에 민초의 삶과 공동체 정신 되새겨
국제 토템폴 문화제로 확장…“전통은 삶 속에서 이어져야”
백두대간과 소백산맥의 고개 죽령은 소백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거센 바람과 함께 오랜 세월 영남과 기호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해온 곳이다. 험한 산세를 넘어야 했던 이 길에는 수많은 보부상과 선비, 나그네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고갯마루를 오르내리며 서로의 무사 안녕을 빌었다. 그렇게 세워진 장승은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마을과 사람을 지켜주는 공동체의 상징으로 자리해 왔다.
올해로 37회를 맞은 죽령장승제는 죽령장승보존회(회장 최규철)가 중심이 돼, 지나온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꺼내 오늘의 시대와 이어가는 자리로 지속해 왔다.
전 김진식 회장과 현 최규철 회장은 올해 장승에 새겨진 명문은 ‘세계평화’와 ‘만인행복’. 최근 나라 안팎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소식들이 시민들의 일상과 삶의 무게까지 흔들고 있는 시기인 만큼, 이번 장승제는 한 지역의 민속행사를 넘어 모두의 평안과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진행됐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올해 행사는 지난 선비문화축제와 연계한 ‘2026 제1회 영주국제 장승·토템폴 문화제’(주최·주관 영주장승축제조직위원회)까지 더해지며 영주의 장승문화를 세계 민속문화와 연결하는 새로운 가능성까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통은 과거 속에 멈춰 있는 유물이 아니라 지금의 삶 속에서 다시 숨 쉬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제37회 죽령장승제 점안식(엄태현 부시장)
# 우리 공동체를 지키는 ‘장승’
장승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얼굴에서 위압감을 먼저 느낀다. 부릅뜬 눈과 크게 벌어진 입, 투박한 턱선과 거친 수염은 멀리서 보면 무섭고 낯설게 다가오지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바라보면 그 표정 속에서 묘한 사람 냄새가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익살과 누군가를 지켜주려는 든든함이 함께 배어 있기 때문이다.
최규철 현 회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장승이 단순한 나무 조형물을 넘어선다고 했다. 장승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조각상이 아니라, 나무가 본래 지니고 있던 옹이와 갈라진 결, 휘어진 모양까지 그대로 품은 채 만들어진다. 사람의 삶도 이와 닮아 있다. 누구도 반듯하고 완벽한 모습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지만, 저마다의 상처와 굴곡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간다. 장승의 표정 안에서 두려움과 해학, 슬픔과 웃음 등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함께 담겨 있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길놀이와 점안식, 채단, 합방 등 죽령장승제에서 이어지는 모든 의례 역시 단순한 재현 행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통나무에 눈을 찍어 혼을 불어넣는 ‘점안식’은 장승제의 가장 엄숙한 순간으로 꼽힌다. 아무 의미 없는 나무였던 통나무가 장승을 깎는 이들의 정성과 염원을 거쳐 비로서 생명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김진식 전 회장은 이러한 점안식을 두고 “무생물에 눈을 찍어 생명을 부여하는 예술의 최고 경지”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어 “말 그대로 혼(魂)을 불어넣는 가장 엄숙하고도 예술적인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세워진 장승은 옛날부터 국가적으로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을 했고, 민초들에게는 마을의 재앙을 막고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마음의 의지처가 됐다.
지난해 죽령장승제
# 죽령장승제가 이어온 화합의 의미
영주는 예로부터 소백산이라는 큰 어머니 품 같은 자연과 죽령이라는 역사적 요충지를 함께 품어온 도시다. 죽령장승제가 지난 1991년 영주와 단양 시민단체들의 화합 취지로 시작된 것도 이러한 지역적 배경과 맞닿아있다.
지금은 영주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죽령이라는 장소가 지닌 의미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다. 경계는 사람을 갈라놓는 선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이어주는 자리여야 한다는 오래된 메시지가 이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현직 회장은 올해 죽령장승제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장승은 결국 사람을 향해 서 있는 존재이며, 마을의 평안과 길손의 무사, 공동체가 서로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 점점 고립되고 공동체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대일수록 장승이 전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서로의 안녕을 함께 빌어주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장승문화가 이어져 온 가장 큰 이유라고 강조했다.
맨 좌측 두번째_전 김진식 회장, 맨 우측 앞 두번째_현 최규철 회장
# 선비도시 영주, 민초의 얼굴까지 품다
김진식 전 회장은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가 선비정신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소수서원과 선비문화가 영주의 높은 정신세계와 학문의 전통을 상징한다면, 장승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또 하나의 문화라는 것이다. 선비문화가 글과 예, 수양의 문화였다면 장승문화는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생활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험한 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세웠고, 마을의 평안과 가족의 안녕을 빌며 함께 지켜온 민중의 얼굴이었다는 의미다.
또 최근 선비축제와 연계해 열린 ‘제1회 영주국제 장승·토템폴 문화제’와 세미나는 장승문화를 세계 민속문화와 연결하려는 매우 상징적인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전·현직 회장은 “나무를 깎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화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행위”라며 “한국의 장승과 북미 원주민의 토템폴, 환태평양의 토템 신앙 역시 모양은 달라도 결국 공동체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에서 닿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 작가들이 만든 이국적인 토템폴과 우리 전통 장승이 한 공간에 나란히 선 모습은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조형물이었지만, 사람을 지키고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만큼은 닮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장들은 “영주가 전통에만 머무는 도시가 아니라 세계 민속문화와 소통하는 열린 문화도시로 나아갈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고 덧붙였다.
토템폴 (Totem pole:북미 원주민의 상징 기둥 조각)
# 전통은 보관이 아닌 다시 살아 움직여야
김진식 전 회장은 지금 장승문화를 이어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이라고 말했다. 과거 영주 곳곳에 남아 있던 장승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고, 남아 있는 기록들 역시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복원 작업도 예산과 관리 문제, 장소 선정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어렵게 복원한 장승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또 전통은 한 번 사라지고 나면 다시 되살리기 어렵고, 기억하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는 이어갈 실마리마저 희미해진다고 했다.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장승을 박제된 문화재처럼 보관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민들이 다시 만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라고 밝혔다.
전·현직 회장은 “젊은 세대에게 무조건 옛 방식을 그대로 배우라고 요구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대신 전통 목공예와 설치미술, 공공디자인과 캐릭터 문화 등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며 “장승이 공공조형물과 관광 콘텐츠, 도시디자인, 교육 프로그램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의미 있는 전승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통은 형태를 고집한다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고 바라봤다.
'2026 제1회 영주국제 장승·토템폴 문화제'
# 기술만이 아닌 마음, 장승 세운 의미 이해해야
최 회장은 장승문화가 앞으로도 이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나무를 깎는 기술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제작 방식과 의례 절차 역시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왜 사람들이 장승을 세웠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어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것도 결국 기술보다 그런 마음”이라고 말했다.
또 전통은 오래됐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필요한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이어져야 한다고 바라봤다.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장승 역시 오래도록 사람들 곁에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최규철 회장은 “앞으로 죽령장승제를 영주 시민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민속축제로 만들어가고 싶다”며 “젊은 세대와 지역주민,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활기찬 보존회로 이어가겠다”는 뜻도 밝혔다.
또한 “장승이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 상징물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며 “선비정신이 고결한 정신문화를 상징한다면 장승은 민초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전통 대중문화”라고 했다.
이어 “장승을 단순히 산속에 세워진 나무로 남겨두지 말고 영주역과 IC 진입로, 주요 관광지와 공공디자인 영역까지 현대적으로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며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승 캐릭터와 상징 조형물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는다면 영주만의 따뜻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죽령 정상에 선 장승들은 오늘도 말없이 바람을 맞고 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오랜 세월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영주의 장승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대가 다시 붙잡아야 할 공동체의 얼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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