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진
텅 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아요 어지럽고 난삽한 주방에서 일을 찾아서 하죠 두 발로 서서 물수건을 정리하고 손님을 기다려요 날개가 작아 날 수 없는 나방이 유리창을 두드려요 천둥이 치고 전등갓이 흔들려요 그날 밤도 이렇게 천둥이 치고 바다에 물거품이 갈기를 세우고 덮쳐왔죠
긴 가발, 하얀 가면, 앞치마, 인간의 걸음걸이로 서빙을 하고 팁으로 콩을 받아요 야생의 습성이 걷잡을 수 없이 쓰나미로 물결치는 밤이면 손님 어깨를 타넘고 가면 속 날카로운 이빨을드러내요 긴 웨이브 가발이 하얀 가면을 가리고 앞치마 속 꼬리가 출렁이면 밖으로 뛰쳐나가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검독수리 그림자처럼 팔을 벌리죠
그 일이 일어난 후,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이 허겁지겁 짐을 싸서 어디론가 떠났어요 아무도 후쿠를 찾지 않았죠 눈을 감자 폐허의 벌거숭이, 흘러내리는 몸뚱어리들, 찢긴 조각들, 다
른 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이 지나고 또 밤이 오면 텅 빈 가게에 전등을 켜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해요 긴 가발을 쓰고 하얀 가면, 앞치마를 두르고 창밖을 바라보며 손님을 기다려요 까딱까딱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고양이 인형처럼
마침내 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다리 사이에 불어와요 부리 없는 새 한 마리가 투명한 눈을 반짝이며 달아나요 귀 없는 토끼가 풀밭을 가로질러요 어둑어둑한 길가에 작은 혹이 주렁주렁 달린 바나나나무 뿌리가 하늘을 향해 종양처럼 뻗어 있는 그 사이 어디선가
후쿠를 바라보는 또다른 눈들
* 피에르 위그의 영상 작업, 〈Untitled(Human Mask)〉(2014)의 원숭이 이름을 상상하였다. 일본어로 후쿠는 복, 행운을 뜻한다.
◇문혜진=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질 나쁜 연애』 『검은 표범 여인』 『혜성의 냄새』가 있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해설> 영상, 설치, 퍼포먼스, 조각 등을 넘나드는 작가 피에르 위그의 작품 《휴먼 마스크》를 시인은, 시의 말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질적이면서 아름다웠다는 평을 받은 현대미술의 퍼포먼스를 문학의 한 장르인 시로 옮김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을 만들어온 피에르 위그를 통해 ‘우연성과 자율성’의 리얼한 현장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 관객이 수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함께 변화를 경험하도록 설계한다. 동물, 식물, 인공지능, 기후 조건까지도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이 특징인 것처럼 이 시에서 식당이라는 공간적 특징에 원숭이 후쿠를 풀어놓음으로 현대미술 혹은 예술의 흐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상상의 싱싱한 먹잇감을 던져주고 있다. 으르렁거리는 개에게 뼈다귀 장미를 번갈아 보여주며 표정을 통해 심리를 관찰하는 예술가의 행위처럼.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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