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한국족보-학술위)
Introducing Two Types of Nobibo (Slave Genealogie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시대 양반만 계보 및 족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문과나 무과 급제자가 매우 적거나 전혀 없고, 잡과 급제자만 있는 문중에서도 편찬한 중인 위주의 ‘중인보(中人譜)’도 있고, 내시들의‘보를 기록한 ‘내시보(內侍譜)’도 있으며, 승려들의 계통을 기록한 ‘승통보(僧統譜)’도 있다. 이러한 신분 계층의 계보에 관해서는 후일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조선시대 노비의 혈통을 족보 형식으로 기록한 고문서(古文書) ‘노비보(奴婢譜)’를 소개하기로 한다.
기존에는 전남 장성 필암서원(筆岩書院)의 노비보(奴婢譜) 1종만 알려져 왔으나, 필자가 1988년경에 입수하여 2023년에 ‘광주이씨대종회보’에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옛 족보이야기]를 연재하며 그 존재를 알린 [길주사천안(吉州私賤案)]도 노비들의 계보로서 현전한다.
It is not only the Yangban (noble class) who possessed lineage records and genealogies (Jokbo)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re are also "Junginbo" (Middle-Class Genealogies) compiled by clans of the Jungin (middle class) who had very few or no passers of the civil (Mungwa) or military (Mugwa) service examinations, but possessed only passers of the technical (Japgwa) examinations. Furthermore, there are "Naesibo" (Eunuch Genealogies) that recorded the lineages of palace eunuchs, as well as "Seungtongbo" (Buddhist Monastic Genealogies) that documented the lineage lines of Buddhist monks. While these genealogies of various social classes will be discussed at a later date, this article introduces the "Nobibo" (Slave Genealogy)—an ancient document (Gomunseo) that recorded the lineages of slaves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a genealogical format.Previously, only one type of Nobibo was known to academia: the one from Pilam Seowon (Pilam Confucian Academy) in Jangseong, Jeollanam-do.
However, the author acquired another document around 1988 and revealed its existence to the public through a serialized column titled [Bibliophile Yi Yang-Chae's Stories of Ancient Genealogies] in the Gwangju Lee(Yi) Clan Grand Association Newsletter in 2023. This document, titled [Gilju Sacheonan (Registry of Private Slaves in Gilju)], also currently survives as a lineage record of slaves.
1. 장성 [필암서원(筆岩書院) 노비보(奴婢譜)]
기존에 알려진 장성 [필암서원(筆岩書院) 노비보(奴婢譜)]는 1745~6년에 필암서원의 노비와 그 자손들의 인적 사항을 족보 형식으로 기록한 고문서이다. 1책으로 앞부분 얼마 가량이 없어진 상태로 19장 37면 분량이 남아있다.
필암서원 [노비보]는 앞부분 일부와 장 19의 뒷면이 없다. [노비보]의 앞부분이 없고, 20세기 후반에 제첩 수리를 하며 서명을 [노비보]로 붙였다는 사실은 이 책의 제목이 [노비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길주사천안]은 앞뒤의 결장이 없고, 고문서의 제목도 분명하다.
(필자 주)
장정은 오침선장본이다. 1975년 5월 1일 필암서원 고문서 14종 64매를 일괄 지정할 때 보물 ‘제587호-1’로 지정되었다.
필암서원은 조선 선조 23년(1590)에 창건되고, 현종 3년(1662)에 왕에게서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여기에는 김인후(1510∼1560)와 양자징(1523∼1594)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삼아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시와 문장에 뛰어나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고,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로, 창건 당시부터 보존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인조 2년(1624)부터 1900년경까지의 자료들이다. 필암서원 문적 일괄(筆巖書院 文籍 一括)을 보면, 필암서원의 노비를 족보 형식으로 적은 [노비보],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원장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필암서원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장성부사하첩』 등이다. 이 고문헌은 필암서원의 운영과 구성을 살펴볼 수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지방교육제도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양반가의 세보나 족보가 아니라 [노비보]가 [필암서원 문적 일괄] 품으로라도 국가문화유산 보물의 한 부분(보물 ‘제587호-1’)으로 1975년 5월 1일 자에 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자 주)
장성 [필암서원 노비보]는 보물 제587호(필암서원 고문서 일괄)에 포함되어 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되었으며, 서원 소유 노비 272명의 명단이 1단에 기재된 19명의 노비를 정점으로 그들의 2대에서 6대에 이르는 후손과 그들의 가계로 종(從)․횡(橫)으로 얽혀 수록되어 있다. 각 노비에는 이들의 성별과 신분ㆍ이름ㆍ생존 여부ㆍ배우자ㆍ나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거(居) 기산(岐山)’ 등으로 현재의 거주지를 기재하거나 ‘도거순창운(逃居淳昌云)’ 등으로 도망간 노비의 근황을 전해 듣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에 따른다는 종모종천법(從母從賤法)의 영향으로, 노(奴, 남종)보다 비(婢, 여종)를 중심으로 가계를 연결한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이른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계보인 것이다.
[필암서원 노비보]에는 노비의 이름, 나이, 신분뿐만 아니라 배우자, 거주지, 심지어 '도망갔다'라는 등의 근황까지 상세히 적혀 있어 당시 노비의 삶을 연구할 수 있다. 이 고문서에 관한 연구는 안승준의 「1745·6년의 筆岩書院 奴婢譜」와 문숙자의 「조선후기 노비 家系와 婢 : 筆巖書院 <奴婢譜>의 분석을 통하여」가 있다.
안승준, 「1745·6년의 筆岩書院 奴婢譜」, 『古文書硏究』4, pp.117~162., 韓國古文書學會, 1993년 6월.
문숙자, 「조선후기 노비 家系와 婢 : 筆巖書院 <奴婢譜>의 분석을 통하여」, 『여성과 역사』11, pp.133~136., 한국여성사학회, 2009년 12월.
(필자 주)
[필암서원 노비보], 1745~6년, 보물(일괄에 포함), 필암서원 소장. [사진-이양재]
[필암서원 노비보]는 횡보(橫譜) 형식으로, 수록된 노비 총수는 272명으로 이중 노h(奴)가 133명, 비(婢)가 138명이며, 그 외에 성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1명이 더 있다. 유형별로는 전래 노비가 230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보이고 있고, 그 외에 35명의 매득 노비와 7명의 속공 노비가 있다. 이들 노비명에는 고(故) 자를 써넣은 부분이 있어 [노비보] 작성 시점에서 노비들의 생존 여부를 기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故’자 표기가 된 노비는 37명으로 전래 노비의 1~2세대는 상당 부분 사망한 상태이다. 사망자를 제외하면 현재 필암서원 소속 노비이거나 이들과 가족 관계를 맺고 있는 노비로서, 3대 전후한 가계를 구성하여 생존하고 있는 230여 명의 노비 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즉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기 사이에 태어난 1세에서 80세 전후의 노비가 현재 생존한 230여 명에 해당한다.
이처럼 [노비보]는 이미 사망한 선대로부터 노비 가계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족보적 성격과, 생존해 있는 노비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노비안'(奴婢案)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풍천임씨가(豐川任氏家) 고문서 [길주사천안(吉州私賤案)]
1988년경에 나는 풍천임씨 임취정(任就正, 1561~1628) 가문의 분재기 여러 점과 함께 매물로 나온 고문서 여러 점을 매입한 바 있는데 거기에 고문서 [길주사천안(吉州私賤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천안은 옹정8년(1730년, 영조6년) 경술 10월에 작성한 것을 무오(1738년, 영조14년) 11월 초 7일에 등서(謄書)한 풍천임씨(豐川任氏) 임취정 후손 소유 노비의 인적 사항을 계보 형식으로 기록한 자료이다.
이 고문서는 축본 1점으로 되어 있다. 크기는 세로 폭이 25.1cm, 가로의 길이는 (25.1×45cm인 종이 6장과 자투리를 연결하여) 약 310cm이다. 159명의 노비를 종보(從譜) 형식으로 적고 있다.
[길주사천안]의 앞 부분과 뒷 부분, 1730년 작성한 것을 1738년에 둥서, 필자 소장. [사진-이양재]
[길주사천안]의 앞 부분과 뒷 부분, 1730년 작성한 것을 1738년에 둥서, 필자 소장. [사진-이양재]
길주(吉州)는 함경도 길주를 말한다. 길주를 비롯한 함경도 지역은 여진족의 영토와 가까워 조선에서 가장 군사적 긴장감이 높은 곳이었다. 이 지역의 노비들은 일상적으로 사냥과 척박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어, 영농 중심의 남방 노비들보다 체격과 전투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사냥꾼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은 근대의 평민(平民) 사냥꾼에서 독립군 사령관이 된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을 보면 잘 이해가 갈 것이다.
조선시대 함경도 북관지역의 노비들은 여진족의 약탈과 침입이 잦았기 때문에, 관청의 노비(관노비)나 양반가의 사노비나, 모두 자신과 주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활을 쏘는 등 군사력을 갖춰야 했다. 그런데 이 사천안이 옮겨 베껴진 무오년(1738년) 11월 7일로부터 불과 50여 일 뒤, 1738년(영조 14년) 12월 26일자 비변사등록 기록에 따르면, 노비들이 상전을 살해하는 조직인 '살주계(殺主契)' 등의 활동이 치열하여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가 한꺼번에 노비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조정에 보고될 정도로 사노비들의 신분 해방을 향한 무력 저항이 극심했던 시기이다.
당시 길주는 겉으로는 여진족을 막기 위한 국경 지대의 엄격한 군사 통제하에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군역의 부담을 짊어지게 된 사노비들이 상전과 국가 체제에 무력으로 저항하며 신분제의 붕괴를 앞당기던 격동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길주 지역의 외거노비들은 독립된 가호를 이루며 농업이나 북방 무역을 통해 재산을 모으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은 재산으로 군역과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시도했다.
따라서 풍천임씨 임취정의 후손에 의하여 [길주사천안]이 만들어진 시대의 배경과 조선왕조 각 시대에 있었던 노비제도의 변천은, 이러한 사천안을 연구하며 살펴보아야 할 관망점이다.
3. 사천안 자료 평가를 유보한다.
[필암서원 노비보]는 안승준과 문숙자에 의하여 상당히 연구된 바 있다. 그러나 [길주사천안]은 지난 40여 년간 나의 서고에 파묻혀 있었다. 이러한 자료의 사장(死藏)은 고서수집가이자 애서운동가로서의 죄악(罪惡)이다.
이제 인생 말년에 이르러 건강의 한계를 느끼며 이렇게라도 자료의 존재를 알리거나, 내가 직접 고문헌을 연구 고찰을 하는 것은 자료의 사장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내가 39세 되던 1994년에 ‘한국애서가상’을 최연소 수상한 이유가 “수집한 자료를 공개 연구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한 것”에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지난 수년간 평생을 별러오며 탐색하였던 고문헌에 관한 나의 관점을 문장화하고 있다.
다음 세대의 시행착오를 막기 위하여 나는 연구를 거듭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여기서는 [길주사천안]의 현전을 소개하는 정도로 글을 마치며 유보(留保)하고자 한다, [길주사천안]과 임취정 후손들의 [분재기]를 연구할 전문 연구자는 따로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4. 맺음말 ; ‘노비보’는 자율적인 계보가 아니라, 타율적인 계보이다.
'노비보'는 이를 양반의 족보처럼 체계적인 계보도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희소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 ‘노비보’는 스스로가 만든 자율적인 계보가 아니라, 소유자가 일종의 재산을 기록한 타율적인 계보이다.
필암서원이 소유한 노비의 명단과 이력․ 나이․ 가족 등을 기재한 [노비보]의 내용은 다른 서원이나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노비안]과 유사하다. 이를 족보 형식을 빌려 기록했다는 점이 특이한데, 노비를 개체 단위가 아니라 가계(家系) 단위로 관리(管理)하려 했던 소유주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노비 관리의 효용성에서 볼 때 사천안은 상당수 작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어딘가에 또 다른 사천안이 비장되어 있을 것이다.
“노비 가계의 존속은 양반가에 적용되는 유교적 의미의 가계 계승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노비의 경우 가족의 형성과 유지·분할 등이 노비 소유주에 의해 의도되고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초기부터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진 양천교혼의 경우 혼인을 통해 소유주의 의도에 의한 가족이 성립되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이미 형성된 가족도 상속이나 매매 등을 통하여 분할·해체될 수도 있고, 몇 대(代) 동안 유지될 수도 있었다. 또 노비 가계의 경우 가계를 잇는다는 것이 성(姓)이나 사유재산의 계승으로서의 의미가 매우 약하며, 세대에 의한 지배의 정도도 매우 약하다. (문숙자의 전게서, p.157)에서 인용”
(2026.05.13.)
추신 : [길주사천안]과 임취정 후손들의 [분재기]를 연구할 의욕과 고문서 해독력이 있는 연구자는 언제든 누구든 내게 연락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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