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면, 공간의 경계를 허물다
전시는 12일까지
김영태 작. BG갤러리 제공
건축물을 잘라낸 단면일까, 아직 지어지지 않은 건축물의 모형일까. 김영태의 조각 앞에서는 이 질문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의 입체작품은 조각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건축물이고, 건축의 일부이면서 다시 독립적인 조형물이 된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그대로 확대해 건축물로 옮겨도 될 만큼 구체적인 공간 구조를 품고 있다. 반대로 건축물의 단면이나 위에서 내려다본 지붕의 구조는 그의 손을 거치며 조각으로 다시 태어난다. “
건축이나 조각이나 공간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똑같습니다.”
그에게 건축과 미술은 애초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건축이 공간을 만드는 일이라면 미술 역시 공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인식한다. 특히 조각에서 그 경계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하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다른 하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크기로 공간을 구축했을 뿐이다.
1일부터 BG갤러리(관장 김수현) 개관전으로 열리는 김영태 개인전 ‘Beyond the Cube, 김영태’에서는 그의 이러한 공간관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에서는 건축적 구조를 품은 조각과 반입체작업을 선보인다.
김영태 작. BG갤러리 제공
◇ 40년 전 건축에서 시작된 질문
김영태의 입체작업을 이해하려면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그는 한양대에서 ‘현대건축에 있어서 탈큐빅 공간형태의 역동성에 관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의 핵심은 당시 현대건축에서 나타나던 ‘탈큐빅(Ex-Cubic)’ 현상이었다. 정적이고 안정적인 박스형 공간에서 벗어나 곡선과 사선, 비정형적인 공간구성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임과 긴장을 지각하는지를 탐구했다.
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형태의 변화 자체보다 공간을 지각하는 인간의 경험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축의 방향이 바뀌고 면이 기울어지며 서로 중첩될 때, 정지된 공간도 관람자에게 움직이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그의 조각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면 절반의 감상에 그친다. 그는 선과 면이 서로 어긋나고 비켜가면서 틈을 만들고, 그 틈은 다시 하나의 공간으로 작동하는 것까지 조각으로 수렴한다. 정면에서 본 작품과 측면에서 본 작품이 다르고, 작품 주변을 움직일 때마다 겹쳐 있던 면의 관계도 달라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건축을 연구하던 시절부터 이어진 공간에 대한 관심이 회화와 조각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됐다”고 설명했다.
김영태 작. BG갤러리 제공
◇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공간으로
김영태의 예술세계에는 ‘선’과 ‘면’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있다. 선은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서예의 기억과 연결되고, 면은 40여 년간 건축가이자 건축학 교수로 살아온 경험과 맞닿아 있다.
그는 대구를 대표하는 서예가 소헌 김만호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붓과 먹을 접했고, 고등학교 미술부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오랫동안 지배한 것은 건축이었다. 영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건축가로 활동하며 공간을 구조화하는 법을 익혔다.
정년 이후 본격적으로 회화에 몰두하면서 어린 시절의 붓의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 “젊을 때는 건축이 앞에 있었지만 그림을 오래 하다 보니 결국 제 손은 다시 붓의 기억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회화는 그렇게 선에서 시작됐다. 전통 건축의 지붕과 기둥, 서까래가 화면으로 들어왔고, 건축물의 구체적인 형상은 점차 사라졌다. 남은 것은 구조와 리듬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만 남았다.
그 선은 서예의 획과 닮았다. 한 번의 붓질에는 속도와 압력, 멈춤과 이어짐이 담긴다. “한 획은 하나의 선이 아니라 하나의 호흡”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선은 대상을 묘사하는 기능을 넘어 화면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면은 그 선을 받아 공간을 만든다. 건축가에게 벽과 바닥, 천장은 공간을 만드는 기본 단위이듯, 그의 회화에서 색면은 하나의 공간으로 작동한다. “건축은 공간을 짓는 일이고, 그림은 마음의 공간을 짓는 일입니다. 방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공간은 캔버스 밖 조각으로 나왔다.
김영태 작. BG갤러리 제공
◇ 조각은 건축의 단면이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작품의 ‘시점’이다. 일부 조각 작품은 건축물을 옆에서 잘라낸 단면처럼 보이고, 또 다른 작품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건축물이나 지붕의 풍경처럼 읽힌다. 선과 면이 만들어내는 구조는 도시의 평면도 같기도 하고, 아직 지어지지 않은 건축물의 설계도 같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도 집이에요.” 그에게 조각은 단순히 집을 닮은 형태가 아니라, 실제로 건축적 공간을 구성할 수 있는 구조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건축 모형’이라는 말로 단정지을 수 없다. 모형은 실제 건축물을 축소해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지만, 그의 작품은 조각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공간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다시 건축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반대로 건축의 한 부분을 떼어내 조각으로 가져오기도 한다. 건축의 단면, 지붕의 구조, 계단과 벽, 선과 면의 관계가 조각으로 번역된다. 건축이 조각으로 들어오고 조각이 다시 건축으로 돌아가는 순환이다. “건축이나 조각이나 똑같아요.” 이 말은 그의 작업 핵심을 정확하게 관통한다.
김영태 작. BG갤러리 제공
◇ 가벼운 재료로 구축한 무거운 공간
재료의 선택도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는 스티로폼처럼 가벼운 재료를 사용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건축이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육중함과 달리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가볍다. 하지만 가벼운 재료로 만든 구조물은 오히려 건축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벽돌이나 콘크리트의 무게가 아니라 그 재료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입니다.”
최근에는 드럼통과 같은 산업적 재료도 작업에 활용한다. 익숙한 생활의 물건을 새로운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재료가 가진 기능적 의미를 해체하고 조형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재료가 달라져도 선과 면, 구조와 공간이라는 그의 관심은 변하지 않는다.
작가는 “재료도 하나의 언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작품 앞에서 관람자가 발견하도록 남겨둔다.
◇ ‘큐브 너머’에서 만나는 건축과 조각
전시 제목 ‘Beyond the Cube’는 김영태 작업의 방향을 함축한다. 큐브는 가장 안정적이고 완결된 공간의 형태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그 안정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발생하는 관계에 있다. 면이 비켜가고 선이 휘어지며, 구조가 열리고 빈 공간이 생기는 순간 공간은 더 이상 고정된 상자가 아니다.
이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탐구했던 ‘탈큐빅’의 문제의식과도 느슨하게 연결된다. 다만 오늘의 작품은 논문의 조형적 재현이 아니라, 오랜 시간 건축과 회화, 조각을 넘나들며 축적한 공간에 대한 사유의 결과다.
전시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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