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멈췄지만 끝나지는 않았다. 정전협정은 군사적 충돌을 중지시켰을 뿐 평화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협정이 권고한 정치회담도 끝내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지 못했다. 정전은 전면전 재발을 막아낸 장치였지만 적대를 평화로 바꾸지는 못했다. 73년째 이어지는 임시적 질서일 뿐이다.
정전협정 41년 뒤인 1994년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화해 협력, 남북연합, 통일국가 완성으로 이어지는 3단계 구상이다. 통일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손님이 아니라 신뢰와 협력을 쌓아가는 과정으로 본 점은 지금도 의미가 있다. 통일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원칙도 버릴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 지도가 그려진 뒤 한반도 지형이 너무 크게 달라졌다는 데 있다. 남북은 화해 협력 단계에 들어서기는커녕 그 이전의 적대와 단절 상태로 되돌아갔다. 북한은 남북을 더 이상 하나의 민족이나 통일 상대로 보지 않고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했다. 핵 무력은 고도화됐고 남북 주민의 생활세계와 정체성도 크게 달라졌다. 한국 사회 역시 단일민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원적 사회가 됐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민족이 결국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1994년의 지도를 들고 있다.
이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한반도 평화공동체 구상’으로 바꿀 때다. 민족을 지우자는 뜻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의 연계는 소중한 자산이다. 민족적 동질성을 단일국가 수립의 필연적 근거로 삼지 말자는 것이다. 한반도 미래는 혈연과 언어의 같음보다 이 땅에 살아가는 주민 생명과 존엄, 자유와 안전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새 구상은 통일을 포기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통일의 형태와 시점을 현 세대가 미리 확정하지 말자는 제안이다. 헌법적 통일 지향은 유지하되 단일국가, 연방, 국가연합, 장기적 평화 공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것은 정해진 결론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평화로운 조건이다.
평화도 통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통일이 오지 않더라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 서로의 존재와 체제를 인정하고, 무력이나 강압으로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으며, 군사적 충돌을 예방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평화 공존은 통일 이전의 대기실이 아니다. 통일 여부와 관계없이 지금부터 만들어야 할 한반도 기본질서다.
기존 자주·평화·민주 원칙도 시대에 맞게 다시 읽어야 한다. 자주는 외세 배제가 아니라 동맹 속에서도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전략적 자율성이다. 평화는 통일의 방법이 아니라 주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우선 목표다. 민주는 미래 국가 형태를 미리 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남북 주민이 그 미래를 선택하는 절차여야 한다.
화해 협력에서 남북연합을 거쳐 단일 통일국가로 필연적으로 나아간다고 보는 직선형 단계론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남북관계는 계단처럼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협력과 대립, 진전과 후퇴가 반복된다. 평화공동체가 충분히 성숙한 뒤 남북 주민과 후세대가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최종 관계를 선택하도록 남겨두어야 한다.
정전 73년은 통일을 재촉해야 할 시간이 아니다. 평화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할 시간이다. 최종 형태는 열어두되 평화의 원칙은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통일국가의 완성형을 그린 오래된 청사진이 아니다.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전쟁 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한반도의 새 지도다.
/김동엽(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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