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헌법적 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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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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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헌법이 시행된 지도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제헌 이후부터 1987년 헌법 이전까지 비슷한 기간 동안 여덟 차례 개헌을 경험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헌법 체제 안정화는 고무적이다. 잦았던 개헌이 대부분 권력에 대한 반민주적 야욕을 배경으로 했기에, 시민혁명의 결실인 1987년 헌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전보다 공고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랜 기간 개헌이 부재한 상황을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헌법은 자유와 권력에 대한 국가적 합의인 만큼, 정치공동체의 변화와 요구에 맞추어 변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각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과 다양한 변화를 경험했고 기본권과 권력구조에 대한 새로운 요청 역시 끊임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민주적 권력 교체가 가능해지면서 개헌 논의는 절실함을 갖지 못한 채 후순위로 밀려났다. 여기에 그간 고착화한 정치적 지형은 기존 헌정 체제에 대한 타성을 강화해왔다. 특히 개헌 절차가 까다로운 경성(硬性)헌법 체제는 새로운 헌법적 요구를 외면하는 명분으로 작용했고, 그 결과 헌법 규범과 현실의 간극은 점차 벌어져왔다.
개헌 논의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권의 태업이 만성화되는 사이, 우리는 결국 내란 사태를 경험했다. 일상적 민주주의의 질서와 안정을 위협한 이 정치적 위기는 공동체의 헌법적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개헌 논의의 강력한 계기가 됐다. 예일대의 브루스 애커먼은 시민들이 일상에서는 각자의 삶에 집중한 채 공적 문제를 제도정치에 맡기다가도, 중대한 위기를 계기로 헌법 질서 자체를 성찰하게 되는 상황을 ‘헌법적 순간(constitutional mome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이는 위기-논의-제안-채택 및 공고화의 단계로 전개되는 일련의 개헌 과정을 지칭한다.
위헌적 계엄으로 시작된 내란, 그리고 그에 대한 민주적 대응으로서의 대통령 탄핵과 선거를 거치면서 우리는 헌법적 순간을 맞이했다. 헌법에 대한 절차적·실체적 숙고에 국민 모두가 열정적으로 몰입하며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이에 대한 헌법적 보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러한 전 국민적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마침내 국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마련됐다. 개정안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이념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을 대한민국이 계승했음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고, 절차적으로는 국회의 계엄통제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개헌안은 국회에서 부결되며 정작 주권자인 국민의 의견을 묻지 못한 채 멈춰버렸고 헌법적 순간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위로부터의 쿠데타라 불린 권력 주도형 내란 사태를 겪고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회복과 강화를 위한 개헌이라는 결실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많은 시민에게 허탈감과 좌절감을 안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5·18민주화운동의 전문 삽입은 단계적 개헌이라는 기치 아래 여야 모두가 선거공약으로 제시해온 최소한의 개헌 과제에 가까웠다. 그마저도 실패했다는 점은 의미가 작지 않다. 부당한 공권력에 맞선 민주적 항쟁의 상징인 역사적 사건조차 헌법에 새겨 넣지 못한 것은 결국 내란 사태에 대한 정치권의 철저한 반성과 쇄신의 의지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여야는 근시안적 당리당략이나 선거공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아직 식지 않은 국민의 열망에 응답하며 다시 개헌 논의에 나서야 한다. 개헌에 대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마중물로 5·18민주화운동을 헌정화해 국가권력의 남용을 경계하고 권력 행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이념적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 변함없이 찾아오는 오월에 우리 헌법과 민주주의가 진 빚은 헤아릴 수 없으며, 민주 헌정을 위협한 내란 사태 이후 대한민국 공동체의 자유와 권력의 재설계는 이에 대한 기억과 반성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못지않게 민주주의 실패의 아픈 과거사를 가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은 그 전문이 “공화국 국민은 과거의 불의를 인식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로 시작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반성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결연한 선언이다. 우리 역시 역사를 잊지 않고 그로부터 민주주의의 내일을 설계하는 다짐의 헌법 전문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그것이 바로 내란 사태를 극복한 주권자 국민이 맞이해야 할 헌법적 순간의 정의로운 결말일 것이다.
박종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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