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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방·일신방직, 지역성장 이끈 생산·소비의 두축

섬유산업은 196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수출을 이끌던 주력 업종이었다. 광주와 전남지역에는 섬유 관련 회사들이 창립, 호황을 누렸다. 섬유업체에 원활한 여성노동자 인력 공급을 위해 관련 학원도 운영됐다.

2부 해방이후 광주 산업화 중심

2. 수출이 애국이던 시대 주역

면방·섬유산업 떠받친 주요 생산 기지 역할

한때 전체 제조업체 종업원 2명중 1명 근무

발산마을·광천동에 자리 노동자들 생활공간

광주천 ·뽕뽕다리에 남은 방직공

섬유산업은 196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수출을 이끌던 주력 업종이었다. 광주와 전남지역에는 섬유 관련 회사들이 창립, 호황을 누렸다. 섬유업체에 원활한 여성노동자 인력 공급을 위해 관련 학원도 운영됐다. 당시 방직공장 취업을 연계한 여공 양성학원 모집 광고.출처:전라남도 향토사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은 1960년대에서 80년대 사실상 광주경제를 대표했다. 자동차, 전자산업이 성장하기 전 광주의 핵심 산업은 섬유, 의류였고 두 방직공장은 지역 최대규모의 생산, 고용 기반 중 하나였다. 광주지역 전체 공업 생산의 40~50%를 차지했고 제조업체 종업원 2명 중 1명은 두 회사의 소속이었다. 출퇴근을 앞둔 새벽 무렵에는 파란색 작업복 차림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임동 골목과 광주천 주변 도로를 메웠다. 버스와 자전거, 도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공장 앞은 광주의 대표적인 노동자 거리의 모습을 연출했다. 임동의 하루는 두 공장의 하루 세 차례 노동자들 근무교대와 함께 시작되고 끝났다.

1960년대 한국은 섬유·합판·가발·신발 같은 경공업 제품을 수출하는 단계였다. 농수산물·광물 중심의 수출 구조에서 벗어난 이 시기 섬유 제품은 한국 전체 수출액의 약 40%를 차지, 대표적인 외화를 획득하는 효자산업이었다.

섬유 제품의 선전에 힘입어 1964년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처음으로 1억달러를 돌파했다.

당시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은 최대 수출산업이었던 면방·섬유산업을 떠받친 주요 생산기지였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은 국가 수출액의 40%를 차지하던 섬유산업의 원사와 면제품을 생산하고 수출용 의류 직물의 기초 소재 공급지였다.

두 공장은 완성 의류를 직접 대량 수출하는 기업인 동시에 국내 직물 업체가 수출품을 만들 수 있도록 면사와 원단을 공급하는 수출산업의 후방 생산기지 성격도 강했다.

1930년대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의 여성 근로자수는 3천명을 넘었다. 사진은 전남방직 공장 내부 모습.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제공. 출처: 오늘의 전남.

1960년대 후반기 광주 산업군의 수출 실적은 전남방직이 1위, 일신방직과 전남제사(도시제사공장 후신)가 2·3위를 다툴 만큼 섬유산업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1970년대까지 광주의 최대 산업은 섬유였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첨병이었던 방직, 방적 설비를 기반으로 수출 주도정책과 맞물려 날개를 단 격이었다. 임동 방직공장의 역설이다.

박정희 정권의 집중적인 수출 주도 정책으로 1970년 이후 우리나라 방적생산량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1973년 섬유제품은 단일 품목군으로 수출 10억 달러를 기록했다.

1970년대 중후반까지도 섬유·의류는 한국 수출의 핵심 품목이었다. 시대 상황이 변했어도 여전한 저임금 구조의 가격 경쟁력으로써 수출 전선의 견고한 지위를 노렸다.

이 시기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은 대형 제조업 기반이 약했던 광주에서 고용·급여 소비 관련 운송과 상권을 동시에 움직인 대표기업이었다.

전국 단위 수출 비중보다 광주 지역 제조업과 근대 산업화에서 차지한 비중이 훨씬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방직공장은 ‘여공들이 저임금으로 일하던 공장’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1960~1980년대는 지역에서 손꼽히는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남성들도 일자리가 많지 않은 시대 상황에서 여성들이 고정급여를 받는 일터여서 입사경쟁률은 치열했다.

1975년 당시 광주 섬유업체 중 100명 이상 고용한 곳은 일신방직, 전방전남지사, 광주직물, 광주어망, 무등양말 등 6곳에 불과했다. 이들 업체는 최고의 호황으로 구직자들의 선호도가 높았다.

1975년 기준 전방과 일신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은 1만8천원이었고, 하계휴가와 명절 보너스로 1만원 남짓한 돈을 더 받았다고 한다. 당시 말단공무원 봉급이 1만5천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액수였다.

전남방직에서 고위 간부를 지낸 조규흔씨는 “70~80년대는 여성들의 경우 고정 임금을 받는 일자리가 많지 않았고, 섬유산업이 호황이어서 인기가 많았다”면서 “남성 직원 중에는 교사를 하다 다시 입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섬유산업은 얼마나 호황이었을까.

1970년대 일신방직 공장 모습. 출처:전라남도향토사

당시 전남방직이나 일신방직은 국내 영업은 거래처를 찾아다니기보다 들어오는 주문을 받는데 가까웠다. 한때 재계 서열 3위였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도 대우실업을 창업하고 핵심사업인 섬유와 메리야스 제품 생산을 위해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에 원활한 원사 공급, 거래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대형 사업장인 임동 전남방직과 일신방직뿐만 아니라 영암, 장성, 담양, 나주 등에는 연관 섬유공장들이 들어서 호황을 누렸다.

광주에는 이러한 공장들에 인력을 공급해 주기 위한 여공 양성학원도 운영됐다. 요즘으로 말하면 폴리텍대학인 셈이다.

두 방직공장의 성장은 임동을 비롯한 광주의 인구 유입과 도시 팽창을 이끈 한 축이었다. 광주부로 승격하고 종연방적 임동공장이 완공된 1935년 5만명 수준이던 광주 인구는 1975년 60만명으로 늘었다. 1975년 당시 광주에서 제조업체는 541개였고, 2만1천848명이 일했다.

구체적으로 제조업체 중 섬유업체가 86개였고, 8천773명이 일했다. 제조업 종사자의 40.2%가 섬유업체에서 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주상공회의소가 1975년 펴낸 상공 연감에 따르면 광주에는 방직 방적 36곳 메리야스 23곳 장갑 12곳 양말 7곳 등 총 78개의 각종 섬유공장이 있었다. 섬유제품을 취급하는 도소매 업체만 150곳이 영업했다. 이 업체 중 74%가 충장로에 있었다.

당시 임동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3천826명이어었다. 두 회사가 고용한 인원이 3천명을 넘었다. 여전히 섬유업체의 고용 파괴력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광주지역 제조업에 종사하던 전체 종업원의 20%에 육박했다.

임동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활동 공간은 광주천 인근 발산마을과 광천동 일대까지 넓었다. 공장은 작업공간이고 발산마을과 광천동 일대는 생활공간이었다.

발산마을과 임동의 방직공장을 이어주던 뽕뽕다리는 흔히 알려 알려진 것처럼 지금의 발산교 자리가 아니라 서림교회 앞길과 발산마을 사이에 걸려있었다. 이 사진에서 다리 끝이 보이는 뽀족한 탑이 서림교회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제공. 출처: 고 김홍인 사진작가(1979년 촬영).

70년대 들어 두 회사는 강점기 시절 기숙사를 헐고 수용 규모를 크게 줄여 신축했다. 회사당 거의 600명 수준이었다. 강점기때 3천명에 달했던 규모와 비교해 보면 크게 줄어든 수치다.

광주 인근의 전남지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은 공장 밖 인근의 발산마을이나 광천동 일대에 숙소를 정하고 출퇴근했다.

그런데 발산마을에 사는 노동자들은 공장 앞으로 광주천이 흘러 출퇴근때 우회를 해야 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전방과 일신방직은 고철을 이용해 철다리를 설치했다. 표면을 타공한 철다리 구조물을 얼기설기 개설한 것이다. 철구조물이 뽕뽕다리로 불린 배경이다.

1965년 호남약도사에서 발행한 호남지역 주요 시가지의 약도를 수록한 자료. 1961년 전남방직 회사가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으로 분리된 상황이 나와있다. 광주역사박물관 제공.

전방 30년사에는 ‘노동자들의 불편을 덜어주고자 사장 지시로 철다리 개설을 전광석화처럼 해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뽕뽕다리는 1987년 발산대교 개설로 철거됐다. 몇 년 전 그 자리에 도시재생사업으로 뽕뽕다리가 재가설됐으나 어쩐지 생소한 느낌을 준다.

수천명의 노동자가 드나들고 광주의 생산과 소비를 움직였던 임동 방직공장은 1980년을 기점으로 강력한 중화학공업으로 정부 정책의 전환에 따라 섬유산업의 생산기지로서 역할도 서서히 쇠퇴해 갔다. 여기에 저임금으로 밀고 들어오는 동남아 국가들과의 가격 경쟁력까지 밀리면서 급격하게 쇠퇴해감을 실감했다.

식민지 수탈의 현장에서 출발해 광주 산업화의 중심으로 성장했던 방직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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