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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라 Insight]1960년대 수출진흥 정책의 신화

케네디는 왜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그해 11월 백악관으로 초청했을까? 1961년 1월 취임 이후 케네디의 고민은 재정적자의 누적과 달러 가치의 하락이었다.

[전라 Insight]1960년대 수출진흥 정책의 신화

김동열(서울대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케네디는 왜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그해 11월 백악관으로 초청했을까? 1961년 1월 취임 이후 케네디의 고민은 재정적자의 누적과 달러 가치의 하락이었다. 그해 9월 대외원조법의 제정과 국제개발처(USAID)의 신설을 통해 무상원조를 유상원조로, 군사지원을 경제개발지원으로 전환했다. 그 와중에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에 군인 출신 지도자가 새롭게 등장했다고 하니 미국의 새 정책을 실험해보고 한국을 새 정책의 성공사례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부랴부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준비해 들고 갔다. 민주당 장면 정부에서 준비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 중에서 5.6%의 성장률을 7.1%로 상향 조정한 초안이었다. 공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계획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박정희는 군사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라는 커다란 성과와 자신감을 얻고 돌아왔다.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다. 박정희와 쿠데타 주도 세력의 자신감은 초기 경제정책의 참혹한 실패로 이어졌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해였던 1962년의 성장률은 3.9%로서 목표치 7.1%에 한 참 못 미쳤다. 전년도의 6.9%보다 낮아졌다. 민심을 얻기 위해 추진한 농어촌 고리채 정리, 내자 조달을 위해 실시한 증권거래법 제정과 대한증권거래소 출범(1962년 4월), 10대 1의 비율로 환을 원으로 바꾼 화폐개혁(1962년 6월)도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1962년의 극심한 가뭄과 흉작은 설상가상이었다. 박정희 스스로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서 화폐개혁의 실패, 농어촌 고리채 정리에서의 실책, 흉작과 쌀 수급 실패 등을 자인한 바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군 출신 대신 관료 출신이 경제정책의 전면에 등장했고, 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의 중심으로 거론되던 김종필은 외유를 떠났다. 2년의 시행착오 끝에 1964년 2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보완계획을 발표했다. 원조 자금을 무기로 한 미국의 조언을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성장률 목표치는 7.1%에서 5.0%로 낮아졌고, 제철소 건설 계획은 백지화됐으며, 투자계획에 있어서 민간의 역할이 강화했다. 내자 조달의 비율은 소폭 낮아졌고, 외자의 비율은 소폭 높아졌다. 투융자 순위에서 수출과 관련된 부분이 제1 순위로 떠올랐고, 수출계획에 구체적으로 노동집약적 경공업, 생산 코스트 인하, 수출산업 위주로 투자 방향을 전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박태균, 2007:337).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신화? 우리는 흔히 박정희 정부의 초기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이라고 알고 있다. 신화다.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에 이어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정책 기조 역시 식민지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과 유사하게 자립경제 건설, 국내 산업 보호, 수입대체산업화였다(박태균, 2007:379)

또 하나의 신화. 우리는 흔히 박정희 정부의 수출진흥 정책이 수출을 급증시켰다고 알고 있다. 이 역시 신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의 수출 급증을 확인하고 나서 박정희 정부가 정책 기조를 수출주도형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유정호, 2009:60). 1962년과 1963년의 수출은 목표치를 초과했다. 그리고, 1964년 5월 박정희 정부는 달러당 130원 수준에서 256원 수준으로 환율을 현실화했다. 이어서 상공부는 그해 6월 ‘수출진흥 종합시책’을 발표했다. 단일변동환율제 도입, 수출입 링크제 도입, 수출책임제 시행, 수출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영업세?관세 등의 감면 확대가 이뤄졌다.

수출실적은 1964년 11월 30일 1억 달러를 기록했고, 연말에는 1억 2천만 달러에 달했다. 광물이나 농림수산물 관련 수출이 아니라 합판?가발?섬유 같은 경공업 분야 제품의 수출이 급증했다. 그러면서 제조업 수출입국의 가능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의 수출 가능성을 확인한 대통령은 1965년 10월부터 월례 ‘수출진흥 확대회의’에 직접 참석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수출 관련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해결사 역할을 했으며, 수출 목표의 달성을 채근했다. ‘박정희=수출’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박정희의 수출입국 신화가 만들어지게 됐다.

박정희가 없었어도 고도성장, 수출입국,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을까? 그렇다는 게 『원형과 변용』(박태균, 2007)의 답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사회의 공감대를 고려한다면, 다른 정부라도 (박정희 정부와)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을 것”(박태균, 2007:380)이기 때문이다.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역량도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의 경제정책을 둘러싼 국제 환경과 영향요인, 핵심 경제주체인 기업인들이 내수보다 수출을 우선 선택하도록 만든 제도(시장 메커니즘)가 더 중요했다는 얘기로 해석된다.

보조금, 법인세, 관세, 금융, 환율 등 가운데 어떤 제도와 시장 메커니즘이 수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까? 특히 강조돼야 하는 것은 1960년대 초반의 환율 현실화와 환율 제도 변화다. 정부가 고시하는 원-달러 공정환율은 1960년 2월 50:1에서 65:1로, 1961년 1월 65:1에서 100:1로, 1961년 2월 100:1에서 130:1로, 1964년 5월 130:1에서 256.5:1로 조정됐다. 1960년 2월부터 1964년 5월까지 4차례에 걸친 조정으로 달러 가치가 현실을 반영하게 됐다. 이로써 1950년대 내내 지속되던 원화의 과대평가는 거의 사라졌다(유정호, 2009:61-62). 게다가 환율제도 자체가 변했다. 해방 이후 이어져 온 복수환율제도, 공정환율제도를 1964년 ‘단일변동환율제도’로 전환했다. 복수환율을 하나의 환율로 단일화하고, 시장의 달러 수급을 일부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추가로 고려해야 할 환경적 요인은 1960년대 초의 세계시장 규모가 1800년대에 비해 100배 이상 컸다(유정호, 2009:69)는 점이다. 엄청나게 커진 세계시장의 규모 덕분에 1960-70년대에 홍콩, 싱가포르,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빠른 공업화와 경제성장을 성취할 수 있었다. 한국이나 대만의 성장 속도가 구미 선진국에 비해 빨랐지만 그걸 기적이라고 부르기는 부끄럽다는 얘기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은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결국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4년에 크게 수정되었다. 수정해서 성공했다. 초기에 성공했다가 실패로 끝난 정책도 많다. 이처럼 정책의 성공과 실패는 음악의 대위법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김영평-송하진, 2006).

프로그램-과정-정치-지속성 등 정책 성공의 4가지 측면에서 1960년대의 수출진흥정책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표 1>에서 보듯이, 1963년 이후의 수출 성적표는 목표치를 크게 초과했다. 1965년 10월부터는 대통령이 직접 수출진흥회의에 매월 참석해 목표 달성을 독려했다. 목표의 초과 달성을 홍보하고 수출기업인들에게 유공자 표창을 수여해 정치적 지지를 확보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제외한다면, 성과의 지속성에도 문제없었다. 요컨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톱다운방식의 목표지향적 정책 과정과 그에 따른 시행착오가 많았다는 점을 빼면, 나머지 3가지 측면(프로그램-정치-지속성)은 무난했다.

사족. 정책수단의 측면에서 보면, 보조금이나 세제 감면 등의 직접적 수단보다는 환율 같은 간접적 수단의 효과가 컸다. 환율을 현실화하고 하나의 환율로 단순화해준 정책의 영향이 컸다. 그 결과, 환율이 시장의 수급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물건을 만들에 해외에 수출하면 국내에서보다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걸 기업인들이 쉽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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