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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라 Insight] 제국주의의 파도와 19세기 말 조선

19세기 말 조선은 안팎으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이양선이라고 불리는 낯선 서구 열강의 함선이 출몰하고, 안으로는 수백 년을 지탱해온 조선의 통치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라 Insight] 제국주의의 파도와 19세기 말 조선

19세기 말 조선은 안팎으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이양선이라고 불리는 낯선 서구 열강의 함선이 출몰하고, 안으로는 수백 년을 지탱해온 조선의 통치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을 가장 깊게 병들게 한 것은 ‘세도정치’라는 기형적인 권력 구조였습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소수 가문이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면서 왕권은 유명무실해졌고, 국가 시스템은 사적인 축재의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관직은 권력자들에 의해 사고 팔렸으며, 매관매직으로 자리를 얻은 탐관오리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 수탈의 정점이 바로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이었습니다. 땅이 없는 농민에게 세금을 매기고, 죽은 사람이나 갓 태어난 아이에게 군포를 징수하며,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터무니없는 이자를 붙여 빼앗아가는 환곡은 민초들에게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여기에 하늘조차 조선을 외면하는 듯했습니다. 19세기 내내 이어진 기록적인 홍수와 가뭄, 그리고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은 이미 피폐해진 농촌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수천 채의 가옥이 떠내려가고 길가에는 굶어 죽은 시신이 즐비했지만, 관리들은 구휼은커녕 남은 식량마저 빼앗았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민초들은 1862년 임술 농민봉기를 기점으로 “죽느니 싸우겠다”며 떨쳐 일어났습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자신들을 인간답게 대접하지 않는 낡은 양반 중심 체제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조선이 내부적인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세계사는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전환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을 완수한 서구 열강은 더 많은 자원과 상품 시장을 찾아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사회진화론’이 박혀 있었습니다.

이 거센 파도 앞에서 동아시아 3국은 각기 다른 생존 전략을 선택하며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청나라는 서양의 군사 기술만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황제 체제는 고수하려는 ‘양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 불리는 이 개혁은 겉모습은 바꿨을지 모르나 속은 여전히 낡은 관료주의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 실패하며 거인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게 됩니다.

반면, 일본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수백 년간 이어온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국가 체제를 전면 도입했습니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서구의 법과 제도를 흡수한 일본은 빠르게 국력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운 것은 근대화의 가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스스로가 제국주의 열강이 되어 이웃 나라인 조선을 첫 번째 침략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조선 역시 강화도 조약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고 나름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외척 세력과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 세력의 저항, 그리고 조선을 자국 영향력 아래 두려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요소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번번이 가로막았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단순히 동양 3국의 세력 다툼 장소를 넘어,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거대 제국들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1885년 발생한 ‘거문도 점령 사건’은 조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 영토가 유린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남하 정책을 펴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 해군이 남해의 작은 섬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이 사건은 조선이 이미 세계 제국주의 세력의 거센 소용돌이 한복판에 놓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림 > 거문도 해도: 영국이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제작된 거문도 해도로 1884년에 간행되었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참조)

이러한 전 지구적 긴장 속에서 조선을 직접적으로 압박한 것은 청나라와 일본의 노골적인 주권 침탈 경쟁이었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며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한 청나라는 조선을 자신의 속국으로 묶어두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발판이자 자국의 생존을 위한 방파제로 삼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조선 조정이 친로(親露), 친청(親淸) 등 외교적 줄타기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애쓰는 동안, 이 땅은 서서히 거대 열강들의 군사적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안으로는 부패한 권력에 신음하고 밖으로는 열강의 먹잇감이 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마침내 민초들이 스스로 방패가 되고자 일어난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었습니다.

정권의 부패와 외세의 침탈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농민들의 고통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그림 > 낚시 놀이: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Georges Bigot)가 1887년 일본 만화 잡지 『도바에』에 실은 만평이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참조)

이때 절망에 빠진 민초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동학’이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신분제의 굴레에 묶여 제대로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며 살던 농민들에게 구원으로 다가왔습니다.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으로 촉발된 동학농민혁명은 이제 단순한 민란의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전봉준을 필두로 모인 농민군은 안으로는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하고 봉건적 신분제를 타파하려는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밖으로는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일본 등 외세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는 ‘반외세’의 투혼을 불살랐습니다.

그들은 황토현과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며 조선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비록 근대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과 관군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우금치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스러져갔지만, 그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동학 농민들이 외쳤던 폐정 개혁안의 요구 사항들은 이후 갑오개혁의 밑바탕이 되었으며, 살아남은 이들의 투쟁 의지는 항일 의병 투쟁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19세기의 아픔과 투쟁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공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복잡한 외교적 파고 속에서, 민초들이 남긴 숭고한 정신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주적 삶의 가치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다시 정립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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